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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그림자
당신의 진심과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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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담
Jun 27. 2023
해가 완전히 밝지 않은
조금은 이른 새벽,
부엌의 형광등을 키고
새벽 배송으로 도착한
먹거리를 정리했다.
택배 박스 속에 들어있던
2kg짜리 쌀봉지를
플라스틱통에
옮겨 담으려다가
조준을 잘못하는 바람에
쌀알이 여기저기 떨어져 버렸다.
분명 쌀알이 튕겨나가는
소리를 들었는데,
싱크대의 하얀 대리석을
보호색으로 삼았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하염없이 찾다가
출근이 늦어질 것 같아서
결국 포기하는 마음으로
불을 껐는데,
그제야 대리석 위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창가로 들어온 햇빛이
쌀의 부피를 미처
통과하지 못하며 만들어낸
쌀알의 그림자 덕분에
부엌을 말끔히 청소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마냥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약간의 어둠 속에서
알아차릴 때가 있다.
투명한 유리잔에
햇빛이 담기며 드리워지는
그림자 속에서
유리 특유의 영롱함이 보이고,
구부정한 손동작이 만들어낸
어두운 흔적에서는
강아지 형상을 발견하곤 한다.
어릴 때는 다양한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됐다.
나름 큰일이라고 생각해
고민을 털어놓아도
곧잘 해결될 거라며
덤덤하게 보내주는
주위 사람들의 밝은 긍정은
마음에 그늘질
틈을 주지 않았고,
스스로를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다가 무한적으로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아닌
침착하고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면,
길을 걷다가 넘어져
훌훌 털고 일어난 후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어버리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먹먹해진다.
환한 빛에서는
눈부심 속에 속내를
쉽게 숨길 수 있었지만,
적당한 빛은
시커먼 진심으로
두터워진 마음을
오히려 들춰버린다.
애써 웃음으로 감싸던
보호색이 걷어지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본연의 감정이
들이닥치고 나서야
그동안 괜찮지 않았음을
눈치채게 된다.
진중함을 비춰주는 존재에게
날것의 마음을
꾸밈없이 드러내며
한없이 연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지만,
덕분에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마주 볼 용기를 얻으며
비로소 강해지게 된다.
당신이 그랬듯이
아주 눈부시지 않을 만큼의
은은한 따뜻함으로
당신의 마음에
그림자를 만들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한결 편해지길
그리고 이를 계기로
당신의 진심과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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