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여유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다져오신 섬세함
엄마와 아빠는 전화번호가
017로 시작하는 핸드폰을
꽤 오랫동안 고집하다가
스마트폰 세계로 합류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으셨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얼떨결에
스마트폰에 입문한 순간부터
대화의 끝이 물음표로
끝나는 날이 잦아졌다.
화면 회전 시키는 방법,
사진 보내는 방법,
지하철 노선 검색하는 방법 등
아주 간단한 질문이라
대답 또한 단순해서
알려드리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텐데,
반복되는 물음에
괜한 심술이 올라와서
누가 들어도 어딘가
불편해하는듯한 목소리를
꾹꾹 누르며
뚱한 표정으로 답하게 된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작은 기계에 통제권을 빼앗겨
얼굴 표정부터 몸짓 하나까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른들을 쉽게 보곤 한다.
주말에 공원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낯선 사람과 거리가 가까워지며
경계심이 잔뜩 올라왔지만,
걱정과는 달리 핸드폰에 대한
사소한 질문을 하셨다.
벨소리가 안 나고
진동만 울린다며
온 세상의 걱정거리를
짊어 든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셨는데,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 상단의 바를 내려
진동모드가 풀렸다는
경쾌한 소리가 나고서야
표정이 환해지신다.
아무 버튼이나 막 누르다가
핸드폰을 고장 낸 줄 알고
대리점에 가야 하나 고민했다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홀가분하게 인사하신다.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어른들이 기계는 잘 못다뤄도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시는 분들이기에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친구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면,
지금으로서는 당연하지 않은 일을
척척해내셨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낯선 카페에 가기 위해
실시간으로 위치가 확인되는
지도 앱이 필수인 나와는 달리
아빠는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지도 한 장만 가지고
200km가 넘는 시골길을 운전하셨고,
카카오톡 메인 화면에 뜬
친구 리스트를 보고 나서야
커피 교환권과 함께
밋밋한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
엄마는 작은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기록을 보며
한 해도 빠짐없이
주변 사람들의 생일을
수화기 너머로 축하해 주셨다.
어릴 때 엄마가 알려주신 뜨개질로
목도리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의도와 달리 작은 구멍이
생기기에 일쑤였고,
길게 늘어져있는
촘촘한 실 뭉치 사이에
간간이 보이는 새끼손톱만 한 구멍은
목도리를 완성하겠다는
의욕을 다 꺾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럴 때마다 안방에서 편히 쉬고 있는
엄마에게 쪼로로 달려가
마음만큼 잘 안되는 서러움을
뱉어내곤 했지만,
귀찮다거나 답답하다는 기색 없이
언제든지 가져오라는 말과 함께
기꺼이 엄마의 시간을 내어주셔서
어느샌가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아날로그로 가득했던
부모님의 젊은 날,
지금은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을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다져오신 섬세함 속에서
어른다움을 느끼게 된다.
20대 후반이 되어도
누군가 집안의 어른을 찾을 때
여전히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는 걸 보면,
스크린 너머로 얻을 수 없는
엄마 아빠만의 인생 노하우가
어른만의 듬직함과 여유를
만드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아직 기계가 아닌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지금,
어쩌면 지금의 사소한 경험들이
먼 훗날에 나를 어른으로
만들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젊은 날을 살아오며
든든한 어른이 되어주시고,
다시 한번 바뀐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의욕이 담긴 부모님의 수많은 물음표에
어른답게 부드러운 마침표를 찍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