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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벌레의 반격

그제야 단단한 껍질이 눈에 들어왔다.

by 가담



최근에 애나 만들기라는
미드를 보는데
"애나 델비를 죽여요.
남인 척은 그만두라고요."
라는 대사가 나왔다.


주인공인 애나 소르킨은
본명과 신분을 숨기고
애나 델비라는 이름 속에서
돈 많은 상속녀로 위장한 채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 감옥에 가게 된다.


한참 사춘기를 겪던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만약에'라는 말을 시작으로
타인이 되는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죽이기에 바빴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이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개미가 말하는 듯이 작은 목소리와
조금만 시선이 집중되면 얼어버리는 성격,
그리고 턱에 있는 두 개의 점까지
점차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한 학년에 300명이
족히 넘는 인파 속에서
나와 반대로 뽀얀 피부를
가진 친구라든가,
발걸음에 모든 감정을 실은 채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친구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학교가 끝나고
혼자 있는 방 안의
거울 속에 비치는
못나 보이는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내가 만약 그 아이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에 빠져
그러길 간절히 바라다보면
어느덧 잘 시간이 다가왔다.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빛나 보였던 타인의 말투와 표정을 훔쳐
어설프게 당돌한 척을 했고,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피부과에 가서
얼굴에 있는 모든 점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꾸며낸 성격과
잡티 없는 얼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깊숙이 박혀있던
고유의 기질과 피부의 점을
뿌리까지 뽑아내기는 어려웠다.


만에 하나 뽑는데 성공했더라도
도려낸 살갗 위에
돋아나는 새살 또한
나로부터 만들어지기에,
온전히 나를 죽이고
선망하는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쉽게 움츠러드는
콩벌레 같은 성격과
얼룩진 얼굴로 돌아와서
원래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누군가가 이런 차분함을 닮고 싶다고
그리고 턱에 있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얘기해 준다.


나에게 남아있던
타인의 모습을 죽이고
가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 보니,
그제야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콩벌레의 단단한 껍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눈두덩이와 콧등에
처음 보는 점이 생겼는데,
이렇게 또 다른 매력이
자연스레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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