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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선물

by 가담



드디어 금요일 저녁.
타지에서 일주일을 보내다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웬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다.
1L 짜리 유리병부터
대용량 담금주병까지 총 9개,
그리고 탁자에 넓게 펼쳐진
노랑빛과 주황빛 사이의
동글동글한 유자도 보인다.


생각났다. 아빠 친구가
유자를 보내준다고 했었다.
이참에 유자청을 만들어 보겠다는
아빠의 말도 언뜻 기억난다.


내가 오기 삼일 전,
그러니까 수요일부터
꽤 본격적으로 준비하신 것 같다.
수요일에는 유리병을 소독하고,
목요일은 유자 세척을,
그리고 금요일인 오늘은
유자의 겉면이 뽀송해질 때까지
가만히 두는 날이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 7시.
모처럼의 주말이라
느긋하게 일어나고 싶었는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 때문에 실패했다.
왠지 지금 이불 밖을 나서면
나도 덩달아 바빠질 거 같은데...


역시 쎄한 느낌은 빗나가지 않는다.
눈이 반쯤 감긴 상태로
엄마 아빠에게 건넨 굿모닝 인사는
잘잤니와 같은 일반적인 안부가 아닌
얼른 거실로 오라는
색다른 인사말로 되돌아왔다.


만화 원피스에서 해적왕이 되기 위해
동료를 하나둘씩 모으는 루피처럼,
아빠는 가장 먼저 언니를 부르고
그다음으로는 나를 자리에 앉히셨다.
아, 참고로 엄마는 아침밥을
준비하시는 관계로 불참이다.


전원 착석 완료.
아빠를 중심으로 분업이 시작됐다.
1단계, 아빠가 유자를 반으로 자르고.
2단계, 이어서 언니와 내가
알맹이와 껍질을 분리한 후
속에 박힌 씨를 제거하면.
3단계, 아빠의 화려한 칼질을 마무리로
유자 껍질을 세로로 가늘게 다듬든다.


시작한 지 5분도 채 안돼서
가장 먼저 엉덩이를 들썩거린 건 언니다.
약간의 노동요가 필요하다며
후다닥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더니
주크박스 겸 핸드폰을 챙겨 왔다.


가장 첫 곡으로는
임영웅의 사랑은 늘 도망가.
노동요라고 하기에는
꽤나 잔잔한 멜로디지만
모두가 만족스러운 선곡이다.


노래가 흐르니 흥도 오르겠다,
그렇게 시작된 스몰 토크.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고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는 뭐였는지,
그리고 밤고구마를 좋아하는지
꿀고구마를 좋아하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손과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막바지가 코앞이다.
같은 자세로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
고개와 허리는 뻐근하고 다리는 저릿하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슬쩍 보니
유자와 씨름한지 어느덧 3시간째.
티브이의 웅얼거림 없이
지금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우리의 목소리만으로
대화를 진득하게 채워본 적이 있었나?


이제 베이킹으로 치자면
마지막 단계인 데코만이 남았다.
손질된 유자와 설탕을
1:1 비율로 맞춰 잘 섞어주고
유리병에 옮겨 담기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누구 손이 이렇게 크담.
병 입구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설탕을 듬뿍 푸는 바람에
하얀 알갱이가 여기저기에 흩뿌러졌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이 이질감.
이미 거실에서 부엌까지
발 도장을 찍어댔으니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거 같다.


유자청을 다 만들었다고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예정에 없던 대청소 시간이다.
설탕 길이 만들어진 동선을 따라
언니가 한번 그리고 내가 한번,
번갈아가며 벅벅 닦았다.
평소보다 마룻바닥이
더 빛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친구가 선물로 보내지 않았다면
유자청을 담그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라는 아빠의 소신 발언.
장장 3일을 거친 대프로젝트였으니
지칠 만도 하셨다.


"조만간 매실청도 만들어봐야겠어"


문맥상 전혀 예측할 수 없던 깜짝 발표다.
말은 틱틱거려도 유자청을 만드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으셨나 보다.


아무래도 아빠 친구의 선물은
종합 선물이었던 것 같다.
향긋한 유자와 더불어
가족 간의 대화,
반짝반짝 빛나는 바닥,
거기에 아빠의 새로운 취미까지.
꽤나 다양한 구성이다.


유독 짧게 느껴진 2박 3일,
벌써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빠는 까먹을세라 일어나자마자
유자청 한 병을 챙겨주셨다.


일주일 동안 숙성시켰다가
잘 저어서 먹으라는 주의사항과 함께
감기에 걸리지 말라는 말도 덧붙이신다.


어쩐지 조금 무겁더라니.
훈훈함이 덤으로 들어있었다.


유자청 한 스푼에
그날의 기억 한 스푼.
여태껏 마셔본 유자차 중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따뜻하고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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