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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담 Dec 24. 2023

살짝 부족함에서 오는 행복감



"자고로 선물은 말이야,
살짝은 쓸모없거니와
살짝은 마음에 안 드는 게 포인트라고"


평소의 우리답게 의식의 흐름을 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번에는 선물이라는 주제에서
꽤나 오랫동안 머물렀다.
 

깜짝 선물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실용적인 선물을 좋아하는가.


평상시에도 이런 심오한
고민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민이는 나와 다르게 명료하게 답을 했는데,
필요한 건 내 돈으로 사면 그만이라며
진정한 선물이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줬다.
어딘가 살짝 부족함에서 오는 행복감이라나.


나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다만 내 변덕에 조금 헷갈릴 뿐.  


태어나서 깜짝 선물을 처음으로 받아본 건
아마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크리스마스이브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산타가 헷갈리지 않도록
어떤 인형을 가지고 싶은지
아주 구체적으로 소원을 빌었건만,
내가 잠든 사이에
워시 리스트에는 전혀 없던
곰돌이 모양의 귀걸이를
머리맡에 두고 가버렸다.


그 나이에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간절함을 담아
소원을 빌었던 터라
몰려오는 실망감이 상당했다.
갖고 싶은 걸 받지 못했다고
고래고래 울어댔으니,
엄마 아빠에게 있어 그날은
크리스마스의 악몽이었을지도 모른다.  


산타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도
학창 시절 때는 친구들과
산타의 선물 방식을 고수했다.
포장을 뜯어야지만 비로소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보니
예상치도 못한 선물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섭섭하기까지 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는데,
다들 주머니에 여유가 생겼는지
직설적인 질문을 통해
갖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걸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다.


뭔가 어른이 된 느낌이랄까.
실패 확률이 제로인 것은 물론이고,
깜짝 선물을 할 때와는 다르게
무엇을 살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다 보니
에너지와 시간이 대폭 절약된다.


최근에 독립 서점에 갔다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종이로 꽁꽁 싸매
표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책이다.   
책에 대한 유일한 단서라고는
주인장님의 코멘트가 담긴
파란색 포스트잇뿐.


'이 책의 저자가 책머리에 남긴 글 중 일부예요.
당신에게 어떤 이슈를 남기고 있다면
이 책을 놓지 마시기를...'


흠,  한 번 사볼까.
평소에 그리 도전적인 사람은 아니다마는
이날따라 불확실한 것에 끌렸다.
정말 운이 안 좋으면
이미 읽어본 책일 수도 있겠지만.


드륵드륵 나오는 영수증을 받고 나서
조용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뭐가 들어있을지 무진장 궁금했지만
내 설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길거리에서 열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뭐가 들었을까.
빨리 뜯어보고 싶다.


이게 뭐라고 어찌나 긴장되던지,
포장지를 아주 천천히 뜯었다.
책 모퉁이를 시작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정체,
다행히 초면인 책이다.
조금은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그래도 마냥 좋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자기 전에 아주 조금씩 읽었다.
그런데 웬걸,
읽을수록 내 취향이 아니다.


산타를 믿던 시절의 나였다면
다 읽어보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울상인 표정을 지었겠지.


비록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선물 개봉식의 두근거림,
그리고 약간의 실망감조차도
재밌게 느껴진다.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실용성보다는
깜짝 선물이 더 좋은 것 같다.  
좋다라기보다는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그토록 갖고 싶었던 인형이
무엇이었는지는 새까맣게 까먹어버렸지만,
예상치 못한 귀걸이만큼은
색감부터 질감까지 여전히 생생하다.
아마 이 투박한 책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어딘가 살짝 부족함에서 오는 행복감,
어쩌면 민이의 말이 백번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도
그런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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