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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갈이를 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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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담
Jan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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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자취를 시작한 지 3년 차다.
네 식구에 강아지들까지 있어
매 순간 조용할 틈이 없어서였는지,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이 삭막하게 느껴질 때쯤
좋은 말동무 상대가 생겼다.
호야라는 넓적한 잎을 가진 식물인데,
내 마음대로 이쁜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녀오겠다거나 다녀왔다는 둥
일방적으로 말을 걸곤 했다.
2년 동안의 조잘거림이 피곤했던 걸까.
최근 들어 안색이 노랗게 질리고,
이파리는 스트레스성 탈모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마침 1월이겠다,
새해라는 좋은 핑계로
새로운 식물 하나를 들여왔다.
좁고 길쭉한 잎이 풍성해서
강아지로 치면 비숑 같은 느낌이다.
잎이 복실복실하니,
줄여서 뽁실이라는 애칭이 딱이다.
임시방편용 화분에 담겨있던 터라
조금 더 튼튼한 화분으로 옮겨줬다.
작은 화분 안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해진 뿌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분갈이용 화분으로 옮겨준 뒤,
싱싱한 흙으로 빈 공간을 메꾸면 끝이다.
"분갈이 안 해줬으면 서운해서 어쩔 뻔했대."
금세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는지,
분갈이를한 지 일주일 채 안 돼서
자기 키의 두 배만 한 새싹을 뻗었다.
일 년에 한 번,
집 계약이 만료될 때쯤
나 또한 분갈이를 고민한다.
모든 게 새로웠던 첫 자취방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왔을 때의 일이다.
외풍이 너무 심했던 터라
계약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사를 가야겠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집주인에게 연락이 오니
평소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집안 곳곳에 의미 부여하기 시작했다.
깔끔한 화이트 톤에 편의점도 가깝고,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닌가.
진심이라기보다는
이사를 가지 않기 위한
스스로와의 타협에 가까웠다.
여기보다 좋은 집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이삿짐센터에 입주 청소까지
알아볼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한 마디로, 그냥 이사를 하는 게 무서웠다.
이사 간다, 안 간다.
잎사귀를 번갈아 떼어가며
미래를 결정했던 것처럼
여러 번의 번복 끝에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회색 벽지에 나무 바닥,
첫 번째 집과는 많이 다른
낯선 공간에 제대로 와버렸다.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 날이 어두워져서
급한 대로 방구석에 이불을 깔고 누웠는데,
어쩐지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느낌이다.
며칠간은 테트리스를 한바탕했다.
침대를 세로 방향으로 놨다가
가로로 돌려 보기도 하고,
결국 창가 옆 세로 방향으로 결정했다.
큼지막한 가구 배치가 끝나고 나니
자잘한 짐 꾸러미 정리는 꽤 수월하다.
수저 통은 부엌 첫 번째 서랍에,
비상약은 침실 수납장 두 번째 칸에.
한 줌씩 빈 공간을 채워나가다 보니
이제야 내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
낯설었던 간격만큼이나
새로운 뿌리를 뻗어 내리면서
저 밑에 가려져 있던
의외의 취미와 취향까지 발견하게 된다.
난생처음으로 글을 꾸준히 써보고,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림도 그려본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사 안 했으면 후회할 뻔했네"
뽁실이가 쑥쑥 자라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오갈 데 없을 만큼
사방이 익숙함으로 꽉 막힐 때,
눈 딱 감고 분갈이를 해야 되는
타이밍인 것 같다.
1m까지 자라는 식물이라는데
과연 얼마나 더 자라려나.
기분 좋은 낯섦 속에서
한 아름 성장하길 바라게 된다.
다음 분갈이 시점이 오기까지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뿌리를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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