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을 다니던 꼬꼬마 시절 때 거실에 앉아 초코우유를 마시며 방석을 쓰다듬는 아주 요상한 습관이 있었다.
베개 하나, 길쭉한 쿠션 하나, 나무늘보 인형 하나. 슈퍼 싱글 사이즈 침대를 가득 채운 솜뭉치로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을 증명해냈다.
하나같이 다 푹신하고 부드럽지만 각기 다른 역할로 나름의 쓰임을 다한다. 베개는 머리를 받치고, 쿠션은 오른쪽 옆구리에, 나무늘보 인형은 배 위에 올려놓고 잠에 든다. 단순하게 솜뭉치를 둘러싼 헝겊의 보들보들한 감촉이 좋은 것도 있지만, 은근한 안정감이 든다고 해야 될까.
생각해 보니 본가에서 우리 집 똥강아지들과 함께 잘 때의 구도가 딱 이랬다. 점박이 해피는 툭하면 내 머리맡이나 배 위에 자리를 잡았었고, 곱슬머리 말랑이는 예나 지금이나 옆구리와 다리 사이에 달라붙는다. 침대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녀석들 때문에 도통 잠을 편하게 자는 날이 없다.
그러다가 웬일인지 저 멀찍이 떨어져서 자는 날에는 되레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이럴 때는 내가 달라붙을 차례다.
깨지 않게끔 조용히 다가가 도넛처럼 둥글게 말아 누워서 생긴 약간의 틈에 파고들어 뺨을 부비적거리며 귀찮게 군다. 볼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뜨끈함에 찌부러질 만큼 꽉 끌어안고 싶어지지만 적당히 하는 걸로 타협을 본다.
꼭 내 옆이 아니더라도 해피와 말랑이는 서로 붙어있기 일쑤였다. 함께 잘 뛰어놀다가도 뭐가 그리 불만인 건지 서로를 향해 왕왕 짖어댔고,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붙어 있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랑이가 슬금슬금 다가가 해피 등에 맞대어 눕거나 혹은 해피 등에 턱을 괴어 잠에 드는 식이었다.
해피가 할아버지였어서 그런지 알짱거리는 말랑이를 귀찮아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말랑이가 찰싹 붙어 있을 때만큼은 자리를 피하지 않았었다. 해피도 내심 말랑이의 무게감을 좋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작은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오르락내리락거리는 배의 움직임과 내 머리칼과는 다른 느낌의 부드러움에 의지가 되어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해피와 말랑이도 서로에게 묵직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주일 치의 온기를 충분히 충전한다. 정갈했던 털이 삐죽삐죽 엉망이 될 정도로 쓰다듬어 주고, 엄마를 꼬옥 안아보고 아빠의 손을 잡으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인사를 나눈다.
시끌벅적한 꿈속에서 막 깨어난 듯이 고요한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기껏 충전해온 정성이 무색해진다. 특히 자야 되는데 잠이 안 올 때, 익숙한 무게감이 더더욱 그리워진다.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아쉬운 대로 주변에 있는 쿠션을 끌어당겨본다. 다음에 만나면 역시 더 세게 안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