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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담 May 12. 2024

돌고 돌아 결국 단정함이구나



"역시 너는 단정한 게 잘 어울려."


네이비색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구제샵에서 할인가로 건진
품이 넉넉한 베이지색 재킷 차림으로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위한
작별 인사를 하던 참이었다.
급작스러운 엄마의 칭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함이 교차했다.  


패션의 과도기를 겪는 중인 건지,
나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옷이다.
이전에는 분명할 정도로 단정한 옷을 좋아했다.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언제입어도 무난하니까.
단정함이 지루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한국 사람들은 옷을 다 잘 입는 것 같다며
어느 인터뷰에 나온 한 외국인과
비슷한 심정을 느꼈을 때부터였다.


거리에 나가면 멋쟁이들이 그렇게 많다.
다들 옷을 어디서 사는 걸까,
왜 나는 저렇게 입지 못하는 걸까.
모든 사람이 비교 대상이 되다 보니
평소라면 전혀 떠올리지 못했을 법한
꽤나 과감한 생각이 머릿속 모퉁이에 자리 잡았다.


'배꼽 정도는 살짝 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옷을 하나둘 사기 시작했다.  
단정함과 10cm 정도 거리가 먼 옷으로.
양팔을 들어 올리면 배가 살짝 보이는 티셔츠에,
밑단이 세로로 쭈욱 트여있는 치마까지.  
옷 자체는 참 예쁜데 내가 입으니 어딘가 엉성하다.
약간의 일탈을 위한 발판은 마련됐지만,
거기에 입고 가기엔 예의가 아니고
아직 날이 많이 춥다는 둥
큰맘 먹고 쓴 돈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게끔
옷에 손이 가지 않는 합당한 이유를 찾기 바빴다.
이제는 날이 더워져서

반년 후에야 입을 수 있을 거 같다.


주말을 맞아 본가에 가기 위해 뭘 입을지 고민했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고.
별다른 약속이 없어

곧장 집으로 들어갈 운명인데도
어지간히 까탈스럽게 군다.
방구석 패션쇼를 요란하게 끝마친 후
결국 고른 옷은 따분함 1, 2, 3이다.
네이비색 티셔츠, 청바지, 그리고 베이지색 재킷.
그런데 이 옷가지가 칭찬을 받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살 돈으로
치킨이나 한 번 더 먹을 걸 그랬다.


어김없이 수많은 멋쟁이를 마주친다.
일요일 오후에 갔던 카페의
50대로 보이는 사장님도 그중 한 명이다.
이마를 빼곡히 채운 앞머리와
하얀 얼굴보다도 더 새하얀 뿔테안경,
그리고 하늘색 셔츠에 시선이 꽂혔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주시던 찰나에도
나도 모르게 흘깃흘깃 쳐다봤다.
뭐랄까, 하얀 벽지에 나무 탁자가 놓인 그곳을 의인화 시킨 느낌이랄까.  


머릿속으로 사장님의 스타일을 빌렸다.
나도 하얀 뿔테안경을 써보면 어떠려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이윽고 깨달은 사실 하나,
나는 절대 사장님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
내가 흘깃거린 건 옷가지가 아닌

그 사람 자체였다는 것.
머리도, 옷도, 안경도 아닌
담백하면서도 포근한

사장님만의 분위기가 좋았던 거야.


분위기, 사람마다 지니는 독특한 느낌.
어쩌면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나란 사람도 분위기란 걸 가졌을지도 모른다.
엄마 말을 힌트로 삼아
가장 나다운 모습을 짐작해 본다.
 

아무래도 단정함이려나.
돌고 돌아 결국 단정함을 택한다.
재미는 없어도 무난하게 꺼내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나와 어딘가 닮은 그런 옷으로.
아무래도 야심 차게 샀던 옷은
앞으로도 입기에 그른 거 같지만,
취향을 찾아줬으니 제값 한 셈으로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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