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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Apr 12. 2020

피자와 피클은 불가분의 관계일까?

냉장고 속 피클 탑을 보며 든 단상




"피자가 좋아? 치킨이 좋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짜장이야? 짬뽕이야?" 혹은 "부먹? 찍먹?"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 압도적으로 한쪽으로 기우는 게 사실이다. 치킨 공화국에서는 치킨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나의 경우는 무조건 치킨보다는 피자다. 일단 치킨 튀김보다는 빵이 좋고 양념 후라이드 반반 못지않게 반반 피자가 매력적이니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치즈 오븐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서 피자를 시킬 때도 많다. 사이드 메뉴 하나만 사서 먹으면 안 되냐고들 하지만 사실 하나만 먹으면 배가 차지 않으니까 피자도 필요하다. 그렇게 야심한 밤에, 혹은 휴일의 점심 즈음에 피자를 시켜놓고 TV를 크게 튼 채로 뒹굴대다 보면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겠구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최근 말이 많았던 배달어플의 호갱이 되어 피자집 곳곳을 기웃거려서 어디 집의 어떤 피자가 제일 맛있고 어디 스파게티가 제일 정성스러운지 추천을 해 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먹던 곳만 시키기보다는 안 먹어 본 데가 궁금해서 호기심에 시키다가 너무나도 퍽퍽한 도우에 실망한 적도 있지만 모두 다 경험이겠거니 하는 마인드로 또 다른 피자집 정복에 나선다. 피자 덕후인 나는 최근 동네 피자, 프랜차이즈 피자 모두 포함해 일주일 4번 피자로 배를 채운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자가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피자집의 경우 사이드디쉬가 지나치게 짜서 치즈 오븐 스파게티 퀄리티는 동네 피자집이 더 낫다. 사실 집에 오븐만 있다면 스파게티 면과 치즈, 햄, 올리브 등등의 토핑을 뿌리기만 하면 될 테지만 오븐이 없으니 뜨끈뜨끈한 치즈 오븐 스파게티를 먹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치즈 오븐 스파게티와 파스타 전문 레스토랑에서 먹는 파스타는 또 결이 다르지만 나는 고급 입맛이 아니어서 그런지 한강 라면급인 치즈 오븐 스파게티가 더 정감이 간다. 물론 생면 파스타도 그 나름대로 맛이 있지만 치즈 오븐 스파게티 특유의 그 느낌이 좋아서 호갱이 되어 자꾸 배달 버튼을 누른다. 그 느낌이 뭘까 곰곰이 고민을 해 봤는데 뭐라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취향저격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구나.


치즈 오븐 스파게티가 좋아서 피자 배달을 종종 시켜 먹는 나는 피자를 한 입 물기도 전에 스파게티를 먼저 후다닥 비우고 피자 먹기에 돌입하는 편이다. 사람들과 함께 피자를 먹을 때면 꼭 핫소스를 뿌려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핫소스를 뿌려야만 조금 더 자극적인 맛이 나서 그는 핫소스를 뿌린다고 했고 갈릭 딥핑 소스나 머스터드소스를 뿌려먹는 그녀는 조금  부드러운 맛이 난다는 이유로 꼭 소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파마산 치즈를 선호하는 그는 짭조름함이 극대화되는 맛이 좋다고 했지만 나의 경우는 그 어떠한 소스가 필요가 없다. 일단 소스를 뜯었을 때 소스 일부가 내 손가락에 튀는 느낌이 싫고 따끈따끈한 피자는 그 자체로 성스러우니 식기 전에 그 맛을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비닐봉지 속의 핫소스들과 파마산 치즈,  피클은 고이 내 냉장고 속 한편에 쌓여가고 있었다. 피클의 경우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뜯어서 먹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어쩌다 보니 뜯지 않은 피클들이 하나 둘 냉장고 한편을 차지하고 말았다. 누군가는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거나 샌드위치에 들어간 오이를 싫어해서 혹은 피클의 지나치게 절여진 느낌이 싫어서 피클을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오이를 좋아한다.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피자를 먹다가 피클을 먹으면 아삭한 느낌보다는 햄버거 먹다가 식혜를 먹는 느낌이랄까 그런 괴상한 느낌이 들어서 피클을 같이 먹기 싫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피클과 피자는 김치와 돌솥비빔밥의 관계를 따라오기에는 아직 멀었다 싶다.



그래서 요즘 나의 쓸데없는 고민은 냉장고에 쌓인 이 피클들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단숨에 청산하는 방법은 버리면 되지만 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피클과 어울릴 만한 음식이 있다면 피클을 함께 먹을 테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다. 냉장고 속 수많은 피클들, 너희들을 어쩌면 좋니. '피클 부자'로 당근 마켓에 등록해서 피클 무료 나눔 행사라도 펼쳐야 할까. 생각보다 피클들의 유통기한이 길어서 그대로 두다 보면 어느 날, 매운 음식을 헉헉 거리면서 먹다가 갑자기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시지도 않은 이 피클이 달아오른 뱃가죽을 진정시켜 주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냉장고 속의 피클들을 다시 들여다보다 문득 영화 <중경삼림>의 파인애플 통조림들이 떠올랐다.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헤어졌던 옛 연인이 좋아했던 게 파인애플 통조림이라서 헤어진 날부터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이 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모아서는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걸 잊겠다는 귀여운 발상. 결국 금성무는 5월 1일 자신이 유통기한이 정해진 파인애플 통조림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30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다 비워버린다. 그러고 나서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 것이다.'와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기한이 영영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 후로 적어야지.' 하는 명대사를 남기게 된다. 한창 홍콩 영화에 빠져 있었을 대학교 2학년 때 감수성 뿜 뿜 하며 영화 속의 어떤 행동들이 의미 있고 신기해서 따라 해 보고 싶었는데 너무 미친 짓 같아서 차마 유통기한이 같은 참치캔을 모으는 일은 포기했다. 참치캔의 유통기한은 한 달 단위가 아니라 몇 년 단위라서 그러다 망부석 되겠더라고.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라서 지금 나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피클부터 두 달가량 남은 피클까지 다보탑 급의 층을 이루고 있는 피클들을 보고 있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왠지 너희들 모두 유통기한이 다 된 그 날, 화장실에서 익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달까. 왠지 나 같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서 주저리주저리 글을 쓰고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내가 치즈 오븐 스파게티에 열광하는 것처럼 피클에 열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피클 탑 옆에 있는 먹다 남은 포테이토 베이컨 피자를 먹는 걸로. 애석하게도 피클 너는 이번에도 선택받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을 그토록 싫어했던 내가 어쩌다 민트맛 커피, 민트 초코바,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게 된 걸 보면 일순간 취향이 또 바뀌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취향이든 인생이든 뭐든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긴 하나 일단 지금은 피클, 넌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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