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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Jul 15. 2020

나도 아내같은 로봇이 있었으면 좋겠다.

로봇 출시되면 앱등이 같이 줄서서 로봇을 구매할 테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아내같이 완벽한 로봇은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딥러닝이 잘 된 인공지능이 딥 페이크라는 가면을 쓴 인간을 빙자한 로봇이 되어 출시된다면 인간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리즈별로 주기적으로 출시되는 핸드폰 마냥 로봇들이 업데이트되어 출시되고 로봇들을 사고파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너무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며 결혼이 귀찮은 비혼 주의자들이 늘어나는 마당에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지금의 핸드폰이야 말로 우리의 분신 아닌가. 손에서 폰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 즐비한데 만약 폰에 그 인공지능이 탑재되어서 1인 가구가 느끼는 허전함을 충족시켜준다면 어떨까. 비단 1인 가구만의 일이 아니다. 실은 결혼을 했다고 해서 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인지하고 있지 아니한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이 관계이며 그 관계의 끈을 한쪽이 놓아버리면 파멸에 이르기 쉬우며 속은 문드러져가지만 겉으로는 행복한 척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며 결혼의 경우, 법이라는 강력한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합의기에 그 무게는 연애와는 조금 다르지 아니한가. 


내 어릴 적 우상, 베르나르 베르베르 


디지털 뉴딜 운운하는 이 시대에 나는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가까운 인간이지만 디지털화된 로봇이 출시된다면 호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아이러니한 인간이다. 뭐랄까. 나에 최적화된 딥러닝을 한 인공지능 페이크 인간이라면 안정적인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달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부모 자식 지간 아니고서는 당신 자신보다 타인을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평생 유지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게 사실이라서 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부모님 대신에 인공지능에서 답을 찾고 싶달까.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니 핸드폰 못지않은 혁신적인 아이템 출시를 기다려보기로 하겠다. 옛날부터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되어 저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입체화된 가상현실이 나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힘든 거 보면 생각보다 맞춤형 로봇의 출시 역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힘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테슬라가 처음에는 비아냥거림을 받았지만 지금은 각광받듯이 실현 불가능한 것을 해내는 기술자들이여, 부디 제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뇌 과학자가 있다면 인간이 자신을 미러링 해서 볼 수 있도록 '복제인간' 급 또 다른 자아를 로봇으로 출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조금 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나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는 장단점은 더욱 명확히 보일 테니 얼마나 좋을까. 내가 내 뇌를 뜯어서 면밀히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감성적인 듯하면서도 이성적이며 변덕이란 놈은 그 사이 언저리에 있으며 오갈 데 없는 진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내 단점마저도 너무나도 잘 인지하고 있지만 고치고 있지 못하는 인간이며 몽상과 현실 사이 그 언저리에 놓인 인간이며 오감이 발달한 인간이다. 만약 나와 같은 인간이 출시된다면 정말 격하게 좋으면서도 격하게 싫을 것 같다. 양가적인 감정은 내가 다 감당할 터이니 2050년 안에 복제인간 급 로봇이 출시되어 내 노후를 함께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반대로 나와 정반대인 '복제인간' 이 개발된다면 격하게 환영할 것만 같다. 너무 달라서 신기할 것이며 경이의 눈으로 보물 보듯 뚫어지게 쳐다볼 것만 같다. 정말 잠이 오지 않는 이 새벽에 오래간만에 타이핑을 하고 있는 이 새벽에 내가 하는 생각은 왜 이렇게 허무맹랑한 것인가. 허점이 슝슝 보이는 맥락 없는 글이라서 성에 차지 않지만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고 정체되고 있는 터라 건설적이기에는 내가 너무 나무늘보스럽단 생각을 한달까. 데미안을 다시 읽으면 알에서 깨어나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친구 말대로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어볼까. 그러면 편견을 깨부수고 조금 더 자유롭게 훠이훠이 날아다닐 수 있을까. 이래저래 생각이 많지만 답은 없고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보자니 남아도는 옷걸이가 자동으로 슉슉 와서 내 옷들을 정리해줬으면 좋겠다는 고도화된 기술을 꿈꾸는 이 시대의 모순적인 인간. 어쩜 좋을까. 나 어떡해.



덧,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서 이어폰을 벗어던지고는 귀 기울였더니 사장님이 그 가수 노래만 주야장천 틀어주셨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내가 자꾸 바이브로 노래를 검색했는데 혹시 제 맘을 아시고는 플레이리스트를 선사해주셨나.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내내 피씨 카톡만 하고 있었던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 드넓은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벽 구석구석까지 퍼져서 좋았다. 그 노래가 아무도 없는 삼층짜리 카페에서 울려 퍼졌다면 좋았을 텐데 그 카페에서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노래가 나와서 표정관리가 안 되더라고. 빨리 나와버린 이유가 노래였다면 다들 믿지 않을 테지만 카페의 선곡이 내게 미치는 영향은 꽤 큰 듯하다. 선곡 기계처럼 카페에 가면 노래천재인 어플을 들이미는 나는 아날로그 인간을 주창하면서도 결국은 디지털에 의존하는 별 수 없는 인간인 모양이다. 가끔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존경해 마지않는 체홉 선생님은 인간은 스스로 믿는 대로 된다 그랬는데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 내 이름의 뜻에는 믿음이 33%나 존재하고 있으며 무려 그 믿음이 비친다고 했으니 믿음이 대략 66%나 있는 셈인데 믿음이 없다. 어쩜 좋지. 내가 뭘 원하고 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을 보니 이래서 내가 르네 마그리트를 좋아할 수밖에 없겠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야말로 초현실주의에 버금가는 생뚱맞은 무의식의 흐름을 어찌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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