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말을 하니, 친구가 언제는 쉬웠냐고 했다. 생각이 많은 자들에게 걸린 저주라나. 그렇다. 사랑이든 감정이든 타이밍이다. 생각을 아주 많이 하다 보면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 걱정까지 하게 되면서 연애 자체가 어려워지고 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랑은 했을지라도 연애를 하지 않은 적은 있었고 연애를 했을지라도 사랑까지는 안 했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호감에 기반해서 연애를 하게 되지만 호감과 사랑은 조금은 결이 다른 감정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 이 어려운 것이다.
"사랑한단 말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에서 인상적이었던 대사였다. 재원(지창욱)이 은오(김지원)에게 "사랑해"를 내뱉었을 때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포 선라이즈>를 꿈꾸어온 나라면 첫눈에 반해서 "사랑해"가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다. 일시적인 호감은 가능할는지라도 그 감정이 '사랑해'까지 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고 감정이 발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포 선라이즈>를 꿈꾸는 이유는 대화의 결, 속도가 맞는 이들이 만난다면 서로 맞춰갈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으니 '사랑해'가 빠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영화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현실에는 단언컨대, 에단 호크가 절대로 없다. 물론 줄리 델피도 없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에서는 눈맞았던 주인공 남녀가 엇갈린 이후 한쪽(지창욱)은 씩씩대고 다른 한쪽(김지원)은 담담하다. 한쪽은 영문을 모르고, 한쪽은 영문을 알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인터뷰 방식이 드라마의 진행이나 몰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쓰는 인터뷰와 극 진행 교차 방식이 너무나도 좋다. 인터뷰를 통해 인물들 고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인터뷰 방식 덕분에 여타 드라마보다 인물이 생동감 있게 느껴진다. 주열매에 과몰입해서 매 회 눈물을 흘리며 질질 짜게 만들었던 <로맨스가 필요해>의 정현정 작가는 여자 캐릭터를 정말 사랑스럽게 만들어내는 마술사 같다. 로맨스가 필요해 2의 주열매(정유미) 역시 당차면서도 여린 캐릭터였고 <도시남녀의 사랑법>의 은오(김지원) 역시 대책 없어 보이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는 캐릭터다. 이들 캐릭터의 공통점은 대책 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속수무책 파란 것이다. <로맨스가 필요해>에서는 주옥같은 내레이션이 많았다면 <도시남녀의 사랑법>은 속마음을 보여주는 인터뷰가 그 내레이션을 대신해서 직설적이고 쿨한 방식으로 조각난 마음들을 보여준다. <도시남녀의 사랑법>이라는 제목만큼이나 쿨하고 세련된 느낌이랄까.
강원도 양양의 서핑 가게 겸 게스트하우스라는 배경 자체도 정말 낭만적이다. 그런 환상을 품고서 종로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백수 시절의 무료함을 달래고 싶기도 했고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낯선 누군가와 눈이 맞아서 '운명의 데스티니!' 하는. 그런데 현실은 노쇼 투성이었고 '스페인어 조금 할 줄 앎'으로 인해 갑자기 아르헨티나 공연단과 사장님 사이의 통역 중개인이 되었고 태국 트랜스젠더 언니와 파키스탄 아저씨의 싸움 때문에 112에 신고하는 일까지 겪고 나서는 '세상이 정말 무섭구나.' 하며 무료한 일상으로 생각보다 빨리 복귀하게 되었다. 여행하면서 주로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던 나는 그곳에서도 데스티니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다들 여행지 가서 패키지에서 눈이 맞기도 하고 자유여행을 하다가도 눈이 맞더라고요.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한 듯합니다. 저만 빼고요. 사실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먼저 경계를 하고 마는 타입이다. 타지에서 나 스스로를 내가 지켜야 한단 생각 때문에 마음의 빗장을 더욱 걸어 잠글 수밖에 없다. 이번 생에 '운명의 데스티니'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대리 만족하겠습니다. 낭만적인 배경에, 여주 은오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다. 자유롭게 살자고 다짐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마저 매력적이다. 원래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면 엄청난 매력을 느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연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라서 매력적이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이 유쾌 발랄해서 매력적이다. <처음이라서>나 <청춘시대>가 20대를 타깃으로 하는 드라마라면 <도시남녀의 사랑법>은 30대가 격공 하면서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일단은 사랑이나 연애가 처음이 아닌 이들이 저마다의 경험에 의해 깎이거나 두루뭉술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그려지니 30대가 격공 하면서 보며 과거를 반추하거나 미래를 그려가지 않을까.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아직 3화까지 봤지만 드라마의 속도감이나 텐션이 고속도로 급이고 인터뷰의 주거니 받거니에서도 티격태격이 그려진다. 겨우 3화라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주로 나오고 있지만 서브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도 궁금하고 도시남녀의 사랑이 얼마나 찌질하게 그려질지 기대된다. 사랑은 쿨한 게 아니고 찌질한 법이니까. 이미 남주 재원(지창욱)은 엄청 찌질하다. 까여도 굴하지 않고 들이대는 재원(지창욱)은 정말 세심하다. 은오의 얼굴에 햇살이 비치자,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로 얼굴을 무심하게 가려주는 장면이 3화 중 제일 인상적이었다. 마음이 왔다 갔다 싱숭생숭했던 은오가 재원에게 마음이 본격적으로 가게 되었던 계기도 그 대목이었지 않나! 이건 마치 추운 겨울,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손에 핫팩을 쥐어주는 것과 유사한, 아주 사소해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별거인 행동이랄까. 엄청난 것보다 사소한 데에서 사랑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정현정 작가님은 그 포인트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분이며 드라마 곳곳에서 디테일함이 표현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겨우 3화에 불과하지만 로맨스가 필요해 2에 버금가는 수작을 만들어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자 최애 캐릭터 은오(김지원)만큼이나 매력적인 남주 경준(김민석)의 분량도 늘려주세요. 수줍수줍 모드에 어리버리함까지 겸비한 이상적인 남자 캐릭터! 1월 1일 4회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