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넷플릭스, 아빠의 바이올린
엄마 추천으로 보게 된 터키 영화 <아빠의 바이올린>은 클리셰 덩어리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다. 영화 <룸>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는 어딘가에서 많이 본, 우격다짐하다가 어른과 아이가 서로 토닥토닥하게 되는 버디무비다. 아빠는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시고 아빠를 오해했던 삼촌은 조카에게 냉랭하게 대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내의 쿠션 역할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겪다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나중에는 하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바이올린'이라는 요소가 등장하는 만큼 음악을 잘 썼기에 귀가 즐거운 특이점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10분이 인위적이고 지나치게 드라마틱해서 별점은 5점 만점에 3.5. 귀성길 버스에서 이 영화 하나 보니까 시간이 휘리릭 가서 좋았다. 의미를 찾는 사람이면 비추지만 재미를 찾는 킬링 영화 덕후라면 좋아할지어다. 심지어 우리 아빠가 보고 엉엉 울었다길래 기대했으나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대놓고 울리고자 작정하는 영화를 보고는 절대 울지 않는다. 서서히 스며드는 영화가 좋다. <드라이브 마이카>가 서서히 스며드는 영화 같을까.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봐야 하는데 걸려있는 극장이 몇 없다. 엉엉 웁니다.
2. 넷플릭스, 프라미싱 영 우먼
친구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 캐리 멀리건의 다양한 변신을 볼 수 있다. 영화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지 않다. 친절한 금자 씨의 약한 버전같이 보였다. 성폭행으로 친구를 잃은 주인공이 시니컬하게 남자들을 바라보면서 술 취한 척하면서 남자를 테스트하는가 하면 친구가 나쁜 일을 당할 때 외면했던 사람들을 혼내주고 싶어 하는 이야기. 어떻게 혼을 내고 어떻게 다그칠지 궁금했는데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주인공은 죽어버린다. 단지 슬픈 죽음이 아니라 실종될 것을 대비해서 자신이 죽고 나서 벌어질 일을 예상한 채 타인을 통해 경찰서로 신고해버린다. '우린 그땐 어렸잖아'로 치유되지 않는 피해자의 상처와 사건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는 '실수였잖아'로 쉽게 넘겨버리지만 피해자는 죽기도 하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견뎌내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어찌 보면 세상은 참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 피해자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는 없지만 뻐킹 유에스에이 정도급은 되는 영화.
3. 간만의 귀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일단 사극에서 여주인공이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져서 좋았고 준호의 낮은 음성과 출중한 연기력 덕분에 몰입하면서 왕 앓이를 오래간만에 했다. 이 드라마는 뺄셈의 미학을 잘 실천한 드라마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생략과 절제를 너무나도 잘 구사하여 만든 드라마로 지루할 틈이 없다. 심지어 로맨스 드라마에서 키스신이 후반부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이전에 각 캐릭터에 부여된 서사가 탄탄하다. 1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할 만하다.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드라마인 데다가 홍국영이란 인물의 잘생김을 처음으로 부각한 드라마다. 개인적으로 응답하라 1988에서 느껴지는 옹기종기, 아기자기함(이 표현이 맞을는지 모르겠으나)의 분위기를 사극에서 표현해낸 따뜻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4. 2022 신춘문예 당선작들
당선작들 중 유영은 작가의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문체도 그렇고 술술 잘 읽혀서 좋았으며 큰 의미를 넣지 않으려고 해서 좋았던 소설이었다. 문장 중간중간에 피식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내가 만약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 역시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 같은 냄새가 나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미보다는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 함흥냉면보다는 심심한 평양냉면 같은 글을 쓰고 싶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평양냉면을 싫어하는 게 함정. 박상영 작가의 오토 픽션 스타일의 소설을 쓰고 싶다. <밀리의 서재>로 박상영 작가님 월요일마다 올라오는 에세이 읽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다. 나는 어쩜 좋아. 박상영 작가한테 푹 빠졌어요. 그 이외에도 장르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올해는 책을 많이 읽기로 다짐했는데 한 달 지났는데 그 다짐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는 듯하다.
5.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작년에 여러 소설가들이 극찬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을 사흘 만에 다 읽었다. 전기장판, 온수매트 없어도 이 책 하나만 있다면 이 겨울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살포시 들었다. 지나친 배경 묘사 없이 극을 이끌어가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휴머노이드 혹은 로봇 입장에서의 서술이 인위적이거나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태양을 주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는 클라라라는 로봇은 태양의 전지전능한 힘을 믿고, 태양에게 소원을 비는가 하면 매연이 태양의 심기를 거스르는 주범이라 생각해서 매연을 일으키는 쿠팅스 머신을 망가뜨리기까지 한다. 그 대목은 귀엽게 느껴진다. 만약 이 소설의 엔딩이 클라라가 돌보는 아이인 조시가 몸이 허약해져서 죽고 클라라가 대용품으로 쓰이는 결말로 났다면 더욱 슬펐을 테지만 엔딩은 담담하다. 조시는 태양을 과하게 쬔 후로 건강해졌고 조시와 릭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클라라는 대학으로 떠나는 조시와 안녕하고 홀로 남겨진다.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 중, 조시가 죽었더라도 조시를 대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아무리 조시를 흉내 낸다 한들 조시의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조시를 둘러싼 개개인의 마음을 흉내 내진 못했으리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로봇이 죽은 누군가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제 아무리 흉내 낸다 한들 그를 둘러싼 사람의 기억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소설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인공지능이 인류를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순한 질문을 던지기보다 인간의 성향과 인간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이야기를 클라라라는 제삼자 로봇을 통해 했으며 쿠팅스 머신을 통해 현실적인 인류의 미래를 고민한 듯하다. 지구온난화가 너무나도 심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비슷한 결의 소설이라고 추천받은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을 읽기 시작했다.
덧, 논란의 솔로 지옥을 재미있게 봤다. 나는 <나는 솔로>류의 콘텐츠보다 <하트 시그널>, <솔로 지옥> 등 치장이 가미된 동떨어진 샤랄라 환상 덕지덕지 예능을 더 좋아한다. 메기로 나온 차현승의 분량이 너무 아쉬웠다. <그 해 우리는>은 띄엄띄엄 보았으나 두 배우의 케미가 환상적이었고 드라마 구성 역시 기존 드라마와는 달라서 좋았다. 엄마 따라 간간히 보았던 <엉클>도 한국에 맞게 리메이크를 잘한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오정세라는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한 것 자체가 의외였고 아역배우와 보여준 브로맨스는 신선했다. 전 세계 1위라는 <지금 우리 학교는>은 2화만 보다 말았다. 킹덤도 그렇고 좀비물은 영 맞지 않는다. 넷플이 <모럴 센스>를 어서 빨리 내 놓아주면 좋겠다. 2월 11일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