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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Jan 28. 2019

친절한 남미씨. 꼴렉띠보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 길.

누구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나, 봉사활동의 의미


산크리스토발이라니, 보카 델 씨엘로에서의 봉사활동이 끝나고 나서 여행을 오려고 했던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그곳이었다. 과나후아토만큼 아름답다고 들었던 그곳은 정말 유화를 보는 듯했다. 빨주노초파남보가 뒤섞여 반 고흐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과일을 파는 아저씨는 내게 과일을 사라고 했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버스 아저씨는 두리번거리는 내게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울먹이며 잘못 온 것 같다고 했더니 아저씨 왈, 그곳은 산크리스토발에서 대략 1시간도 채 안 걸린다고 콜렉티보를 타고 가라고 했다. 40페소를 내라길래 또 흥정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아저씨는 안 된다고 단칼에 잘랐다. 모두가 40페소를 내기 때문이란다. 생떼를 더 부리려다가 지쳐서 조수석에 짐을 싣고 앉았다. 사람들이 대여섯 정도 타니 아저씨는 운전을 시작했다. 신기해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바람을 맞으니 아저씨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고 우리는 또 금세 친해졌다. 사기를 당했다며 툴툴댔던 몇 분 전의 나는 또 들떠서 실실 거리며 웃고 있었고 톤날라로 가는 도로 풍경도 아름다웠다. 멕시코는 역시 남부가 아름답다더니 진짜 그런 모양이었다. 톤날라에 도착한 나는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보카 델 씨엘로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캠프장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마을에 도착한 나는 또다시 두리번거리며 콜렉티보를 외쳤다. 이곳저곳 물어가며 혼자 헤맸더니 지나가는 택시는 타라고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200페소를 달라고 하길래 손을 내젓고는 다시 버스 정류장을 찾아 나섰다. 콜렉티보는 4명의 사람이 모여서 20페소씩만 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난 젊은 부부와 할머니 한 분과 함께 동석하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택시에서 본 풍경은 산크리스토발과는 또 달랐다. 이곳은 멕시코의 한적한 시골이었는데 제주도에서는 볼 수도 없는 엄청 큰 야자수가 양쪽 길가에 줄지어 서 있었다. 10여분을 쌩쌩 달리다가 택시는 어떤 아주머니의 손짓에 멈춰 섰다. 에이 설마 타는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내 옆에 타는 게 아닌가. 오 마이 갓. 아무리 10페소라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니까 참아야지 했다. 그러더니 택시 아저씨는 또 멈춰 서서 승객을 더 태우려고 했다. 몬테레이에 있을 때는 3인 이상 탑승 금지였는데 난 다섯 명과 함께 덜그럭거리는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보카 델 씨엘로라는 마을에 도착했고 내가 택시에서 내리자 나는 동물원의 사자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나를 아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내가 스페인어를 아주 잘 구사했다면 재미있게 이야기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스페인어가 유창하지 못했던 난 돈데 에스 타스 또르뚜 가스만 외치고 있었다. 거북이 어딨냐 거북이 어딨냐 이러고 있으니 꼬마들도 나를 보고 웃었다. 예정대로라면 난 이 곳에 두시쯤 도착했어야 했는데 난 여섯 시쯤 이 곳에 도착해서 봉사활동 리더를 만날 수도 없었다. 쏼라쏼라 스페인어 틈 사이에서 ‘where are u from'이라는 영어가 들려왔고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 마냥 코리아를 외쳤고 그와 선착장 근처에서 타코를 먹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peter였고 캐나다인이었다. 70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그는 타코만 먹고 나서 나를 거북이 구하기 봉사활동을 하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의 배를 타면 뱃삯을 어마어마하게 부를 터이니 자신이 집으로 가는 길에 태워주겠다고 했다. 고맙다고는 말을 했지만 그가 사주는 퀘사디아를 먹으면서도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친절하나 의심을 하고 있었다. peter는 어떻게 내 속을 꿰뚫었는지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나 말고 다른 미국인 봉사자를 자신이 오늘 태워주기도 했다고 나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난 순간 볼이 발그레졌고 그를 믿기로 했다. 그는 내가 일할 곳에서 보이는 작은 섬에서 혼자 집을 짓고 살고 있다고 했다. peter가 노를 젓고 나는 가만 앉아서 물살을 가르는 그의 노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대뜸 saving turtles를 하는 strategy 가 뭐냐고 물었다. 내가 그저 거북이를 돕는 것이라는 말로 얼버무리자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strategy는 killing yourself라고 했다.


내가 죽으면 거북이가 산다니, 이 기괴한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peter는 내게 너는 helping yourself를 하러 이까지 온 것 아니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 멕시코에 온 김에 뜻깊은 해외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남들이 다 하는 해외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나선 것도 있었다. 그러했다. 거북이를 진정 위한다면 거북이가 자연환경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그들의 삶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구환경을 보호하고 동물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구호로 그들의 삶을 인위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해외봉사활동을 찾아본 이유 역시 남들이 다 스펙 중의 하나로 해외봉사활동을 하니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을는지도 모른다. peter의 돌직구에 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학점관리부터 시작해서 온갖 대외활동을 통해 자신의 스펙을 쌓아가야 하는 한국사회로부터 탈피하고 싶어서 택했던 남미행이었는데 나는 이 곳에서도 스펙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그렇게 자라온 이상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인가. 그렇게 피터와 이야기를 하다가 캠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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