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하여
서운함 그리고 또 다시
나이가 들수록,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온전히 얻어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못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단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져만 간다. 옛날에는 거절당해도 그럼 다른 사람 찾지 뭐 하는 생각으로 쿨하게 척척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는데 그게 쉽지는 않다.
"힘들 거예요 아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숨 섞인 그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어떤 어젠다를 가지고 어떤 의문을 제기하고 싶고 또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컨택이자 섭외 시도였다. 적극적으로 응해줄 것이라 생각한 것은 내 오산이었다. 그렇지 요즘 최저임금이 얼마고 요즘 인건비가 얼만데 싶으면서도 내 마음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서운하고 서글펐다.
처음에 메일이 읽씹 당하고 회신도 받지 못했을 때는 화도 나고 서운했다. 응하기 싫으면 싫다는 거절 의사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그토록 힘든 일인가. 나는 분명히 구구절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담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말했는데 너무 아마추어스럽게 늘어놓았나. 매체의 파급력이 크지 않아서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라면 어떨까. 내가 힘든 상황인데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민다면 같이 얘기해보자고 한다면 나는 어떨까.
그 저의를 의심할까. 허심탄회하게 낯선 사람에게 내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얼굴을 직접 맞대어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목소리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경계를 할 수도 있겠구나. 실제로 기업 몇 곳에서는 경계부터 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실은 간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기업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수였으니까. 그렇지만 당연히 호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응원하고 싶었던 집단이 호의적이지 않아서 서운했다. 들이댔는데 까였을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하고 거절당하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보다 일을 하면서 거절을 당할 일이 없기도 했다. 시민들도 의외로 내가 들이대면 경계하지 않고 잘 응해줬고 나는 거절당해도 잘 들이대는 과라서 쉽게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 왔다. 수능 때도, 새해에도 좋은 시민들이 그 추위를 녹여주었고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찌 보면 아침 프로를 하면서도, 밤 프로를 하고 있는 지금도 전문가 섭외는 척척 되었던 것 같다. 아침이라서 힘들다고 하면 녹음을 하면 되었고, 호의적으로 베푸려는 사람들도 많았다.(인간의 기억은 늘 왜곡되는 법이라 좋은 것만 기억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 더 일찍 그리고 조금 더 뜸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진행했다면 저번 달에 열렸다는 기자회견이나 집회 취재도 충분히 가능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해 보자 라는 마인드로 착수하려 하지만 그리고 어쨌든 답은 줬지만 힘들 거라는 말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인터뷰에 응해줬으면 좋겠지만 중요한 '사명감' 이 없다고 했다. 사명감이라는 단어가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그럼 나는 지금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한편으론 반가웠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왠지 뭉클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어다녀보겠다고 다짐한다. 일희일비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