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를 읽고
2. 소설 [크눌프] (30)
2) 크눌프에 대한 나의 기억 (19)
④ 잊힘의 두려움 (6)
‘이른 봄’과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에서 크눌프가 한 여인과 한 사람의 ‘나’와 만나 이야기하고 헤어질 때 한 가지 공통점이 나타납니다.
‘술’이 등장합니다.
술은 소설 ‘크눌프’에서 상황 변화를 일으킵니다.
좋든 싫든 술을 마시고 크눌프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크눌프가 결단을 내리는 데 한 몫을 하게 됩니다.
‘이른 봄’에서 연인과 만난 뒤 크눌프는 이상에서 현실로 내려옵니다.
민낯을 드러낸 크눌프는 이별의 통보도 없이 떠납니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에서도 술은 이별의 징후로 등장합니다.
술이 두려움을 자극합니다.
위안이 아닌 부담으로 그를 짓눌렀습니다.
술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기회를 엿봅니다.
이상에서 떠돌며 자리 잡지 못하는 인간들을 찾아 현실의 혹독함을 맛보게 합니다.
또한, 현실을 두려워하는 일부 인간의 마음에 헛바람을 불어넣어 허망함을 체험하게 합니다.
소설 [크눌프]에서 술은 맛을 내지 않습니다.
향내도 풍기지 않습니다.
색깔 역시 두루뭉술합니다.
술을 마시지만 찡그리는 법이 없습니다.
갈증을 쓸어내는 청량감도 보이지 않습니다.
쾌감 역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소설 [크눌프]의 술은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술은 취하라고 먹는 것입니다.
술은 취해야 자기 몫을 하는 법입니다.
소설 [크눌프]의 술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두려움의 대상으로 크눌프를 압박합니다.
소설 [크눌프]에서 술은 크눌프를 바라보는 역할입니다.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술은 알고 있습니다.
술은 알면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술의 등장은 장면의 변화를 뜻합니다.
술은 파란색 약인지, 빨간색 약인지 크눌프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파란 거, 빨간 거 결과는 똑같습니다.
선택만 할 수 있을 뿐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영웅 크눌프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 과정 중 하나입니다.
술로 크눌프는 깨닫게 됩니다.
이상이 무너지자 혼란을 겪습니다.
현실에 부딪혀 갈 길을 잃습니다.
대비하지 못한 민낯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믿는 구석이 사라지자 휘청거립니다.
술로 현실을 잠시나마 잊는다는데 크눌프는 반대이었습니다.
술이 크눌프를 이상에서 현실로 끌어내렸고, 가면마저 벗겨버렸습니다.
크눌프는 멋쟁이가 아닙니다.
친구들의 자랑거리에서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기백, 자신감도 힘을 내지 못합니다.
영웅인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와 이별도 술이 함께 합니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에서 술은 여전히 무색무취입니다.
낭만도 없고 맛도 없습니다.
떠들썩하지 않고 밋밋할 뿐입니다.
쌓인 것을 털 여유도 없습니다.
술이 재미가 없습니다.
‘나’와 이별만큼 심심할 따름입니다.
술 한 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술자리 이후 크눌프는 ‘나’를 떠납니다.
술은 두려움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현실과 두려움은 술로 대적하기 힘든 상대이었습니다.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통과의례로 술은 소설 [크눌프]에서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일조하지만, 장면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술이 색을 잃고 향내가 없으며 독하지도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소설 [크눌프]에서 술은 생각보다 비중이 적습니다.
실제 술은 향기에 취하고 맛에 취하고 색에 취하고 청량감에 취하고 기분에 취할 수 있어 소설 [크눌프]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기에 현실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