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
“주책없게 눈물이 나네요. 엊그제만 해도 얼굴 맞대던 사이였는데. 그렇죠, 거의 매일 만났으니까요. 절친이었죠, 절친, 음. 죄송합니다.
딸이 같은 반 되면서 만나게 된 거죠. 친구로 지냈고요. 당연히 의지가 됐죠, 같은 심정이고 나이도 비슷하고 두루 잘 맞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되니까 혼란스럽네요. 저야 견딜 수 있겠지만 딸이 힘들어해요. 충격이 컸거든요. 지금요? 학원에 있죠. 고 삼이잖아요. 친구도 이해해 줄 거예요.
맞아요, 그렇게 말씀드렸죠. 다시요? 음, 알겠습니다. 친한 사이였다는 거 말씀드렸고, 그다음부터?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운동도 같이 하게 됐어요. 아파트 산책로를 주로 걸었죠. 오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거든요, 쉬엄쉬엄 산책하는 겸해서 했던 거죠. 한 시간 정도 걸었어요. 그렇죠, 산책로 옆쪽으로 둔덕이 있는 거고 그 너머가 도로이고요.
아지트 말씀드려야 하나요? 다시 갈 일 없을 거 같은데, 섬뜩하네요. 우연히 발견한 거죠. 그러니까 둔덕 너머 뭐가 있는지 궁금했던 거예요. 괜히 궁금한 거 있잖아요. 막상 별거 없더라고요. 그래서 넘어오려 하는 데 구덩이가 보이는 거예요. 다듬으면 들어가 앉아있을 수 있겠다 싶어 아지트로 삼았던 거죠. 자주 가지는 않았고요. 가끔 들렀던 정도죠. 아닐 거예요, 우리 말고 다른 사람 흔적은 없었으니까요.
예, 그날이라고 특별한 건 없었어요. 산책로 초입에 중학교가 있어요, 보통 두 시 삼십 분 정도에 거기서 만나거든요. 그날도 그랬고요. 시어머니 관계는 알고 계시죠? 얼굴에 한바탕 했구나 쓰여 있더라고요. 자주 있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세상 참, 선한 사람이 그렇게 떠나다니. 죄송해요. 제가 좀 산만하죠? 친구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이놈의 집안은 싸움이 다반사야, 이렇게요. 시어머니와 시시 때때 다퉜고요, 남편 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큰일 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무섭네요. 시어머니하고 사이 안 좋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죠. 유별났으니까요. 유별난 아들 사랑만큼이나 유별났던 사이였어요. 뭐 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아들이 마마보이로 유명하잖아요. 나이가 사십이 넘었는데도 젖먹이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 양반 지나가면 다들 쑥덕거렸어요. 그리고 며느리는 왜 쫓아다니는지, 그렇게 따라다닐 수가 없어요.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니까요. 전화는 얼마나 자주 하는지, 신경쇠약 걸린다고 했다니까요.
특별한 관계죠, 아주 특별했던 관계였죠. 남편도 모르긴 몰라도 방관자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싸움 났는데 팔짱 끼고 지켜만 보는 사람. 뭐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죠. 그게 그렇잖아요, 예민하기도 하니까요. 자칫 자존심 상하면 그러니까,
다른 날과 다른 게 없었어요. 제가 먼저 가 기다렸고, 곧 친구가 왔어요. 얼굴이 안 좋았다는 말씀드렸죠, 자주 그래서 별 문제 아니겠지 했던 거고요. 진짜 그런 줄 알았어요, 이런 일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얘기 나누다가, 아지트로 들어가게 되었죠. 희한하죠? 누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아지트에 앉아 있었던 거예요. 매일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누가 가자고 해야 가는 곳이었거든요. 그날은 그랬어요. 친구 눈에 슬픔이 가득하더라고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왜 그러냐고 물을 수 없었어요. 고개를 돌리더라고요. 그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힘들어도 씩씩한 척했던 친구였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눈물 보이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얼마 지났을까, 혼자 있고 싶다고 했어요. 측은했어요, 솔직히 측은했어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도움이 되었던 걸까, 걱정만 더 키운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는 요청에 따르는 것밖에 별다른 수가 없었어요. 알았어 그럼 하고 일어났죠. 돌아보지도 못했어요.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요. 쳐다볼 자신이 없었거든요. 둔덕 넘어 산책로로 내려와서 시계를 봤어요. 세 시 정각, 낌새가 이상해서 그랬던 걸까요. 죄송해요, 감정이 북받쳐서.
그리고 바로 집으로 왔어요. 저녁 먹고 나서 소식을 들었고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동시에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경황이 없어 뭐라고 말씀드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가 않아서요, 죄송해요. 아지트에 쓰러져 있었다고 하신 거, 맞죠? 음, 으, 음. 예, 음. 그러니까 제가 떠난 게 세 시였고, 하교하던 학생들이 친구를 발견한 게 세 시 사십 분이라고 하시니까 그 사십 분 사이에? 끔찍하고 무섭네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어떻게 그런 일이. 돌멩이요? 치운다 치운다 했는데 그렇게 될 줄이야. 그럼 만약 제가 자리 뜨지 않고 같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끔찍하네요.
애들 다 고 삼으로 한창 예민할 때잖아요. 우리 애도 그렇지만, 친구 애 얼마나 충격받았을지 걱정이네요. 하필 이럴 때, 소식 듣고 얼굴이 하얘지더라고요. 공부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학원 간다는 전화받고 그나마 안심이 됐죠. 전교 일 등 맡아서 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 애와 다르죠. 탄력 붙고 있었는데, 이 일로 꺾이면 낭패 아니겠어요. 그게 걱정인 거죠. 제 생각만 하네요. 그게 뭐 딱히 구실이 없으니까요. 여기까지 하면 안 될까요?
일기요, 친구가 보여줬어요. 두 달 정도 됐을 거예요. 아지트에 앉아 있는데, 뭔가 건네주더라고요. 공책이었어요, 요만한 거. 뭐냐 하니까, 한 번 읽어봐 하더라고요. 일기였어요. 의외였어요. 아니 솔직히 놀랐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알고 있던 친구와 다른 사람이 거기 있었던 거니까요.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뜬금없었거든요. 말이 안 되잖아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요. 다시 읽어봐야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요. 말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어리둥절, 혼란스러움. 친구를 꽤 안다 싶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실상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진짜 놀랐거든요. 시어머니와 남편 때문에 힘들다고 했던 건 표면적인 문제였던 게 되잖아요? 감추고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거예요. 읽어보셨을 테니까 아실 거고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결혼한 사람이 따로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게, 고 삼 수험생을 둔 학부모가 그것도, 여태 모두를 속였다는 게, 당시 거기서 친구인 저에게 그걸 보여줬다는 게, 모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으면 그런 식으로 털어놓았겠어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충격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동시에 그걸 제게 보여줬다는 것에 고맙기도 했어요, 그만큼 저를 믿는다는 거잖아요. 솔직히 많이 부러워했어요. 시어머니와 악다구니해서 힘들기는 했지만, 그거 빼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거든요. 남편 직장 튼튼하고 돈 잘 벌어오겠다, 딸 전교 일 등 맡아서 하겠다, 집도 대출 없이 갖고 있겠다,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딸에게 잔소리하죠, 친구 딸만큼만 해라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 말이죠. 제게 친구는 늘 따라가야 하는 존재였던 거죠. 늘 앞서 있는 그런 존재였어 요. 그런데 동등하게 대해줬던 거예요. 애들끼리 잘 지내도록 해 주고, 저도 인간답게 받아주고요. 그랬던 거 같아요, 가끔 언니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한참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머리가 하얘진다는 걸 그때 실감했어요.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희한하죠.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죽네 사네 친구 같기도 하다가 남 같기도 하고, 한통속인 거 같기도 하다가 필요로 만나는 거 같기도 하고요. 지금은 더 모르겠어요. 친구라고 해야 하는 건지 말이에요. 남들한테 둘도 없는 친구처럼 보이기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넘지 못할 벽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욕심 때문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요. 일기 보고 난 뒤였을 거예요.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전에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요. 아니, 그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죠. 모르겠어요, 뒤죽박죽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요. 친구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아요. 뒤죽박죽이에요. 죄송해요.
그날 이후 일기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어요. 서로 조심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아니, 그때 관심을 더 가졌어야 하는 게 맞는 건가요? 충고해야 했을까요? 정신 차리라고요? 친구 아픔을 외면한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랬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요? 예, 감사합니다. 그럼 일기가 주요? 그 주요? 그거 증거물. 증거물이 되는 건가요?”
- 남편
“감사합니다. 힘드네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시죠. 이십 년이 넘었네요. 연예 결혼했고요. 딸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제 탓 같아서 가시방석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만큼 화목한 가족이 있겠느냐 자신했습니다. 가족은 제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내, 딸 그리고 어머니.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 닥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입니다.
떠난 사람 욕보이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드려야 하니까요. 몇 달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전 화목하다고 해놓고, 이상한 낌새라고 하니까 이상해 보이죠? 가족은 제가 평생 일군 밭이었습니다. 이곳만은 걱정이나 근심 없기를 바랐던 거죠. 욕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욕심이었죠. 화목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발 뻗고 쉴 수 있는 곳이길 바랐습니다, 평생. 방해가 있어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요. 이상한 낌새 역시 지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거죠. 평온, 제가 가족에서 최우선 삼는 게 평온입니다. 잔잔한 호수 물결 같은 거죠. 그렇게 유지되길 바랐던 것이죠.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녁 먹으며 대화 나누는 걸 좋아했습니다.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나눴죠. 어느 순간 그게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불편해하는 게 보였습니다. 평소와 달랐던 거죠. 일시적이겠지 했는데,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긋나 있던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뒤늦지 않길 바랐습니다. 안달 났던 거죠. 바로 잡으려 하는 순간, 늦은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습니다. 아니 되돌릴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네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엉켜버렸습니다. 지금 제대로 말씀드리는 건지도 확신이 없습니다.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는 걸, 말 그대로 실감했던 거죠. 다른 사람 얘기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루하루 멀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는 점점 남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바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아내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직접 답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게, 참 맘대로 되는 게 없었습니다. 제 속은 타는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묵묵부답,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만 연신 저을 뿐이었죠. 속 시원히 답해달라고 빌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얘기해 줄 수 있느냐,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무너지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우르르, 평생 유지하려고 했던 균형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평정심이요? 그런 게 있었나 싶더군요. 그다음은 폭군으로 살았습니다. 폭력 직전까지 가기를 되풀이했고요, 여전히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마저 알게 되셨습니다. 어머니와 제 관계는 알고 계시죠? 부끄럽습니다. 어머니께 털어놓았고,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됐던 것입니다. 곤란해졌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뒤였습니다. 분명 제 잘못입니다. 어디선가 멈추어야 했는데 제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 훔쳐보았습니다. 일기에 손을 댔습니다. 충격이었죠, 세상 누구도 그 순간 눈이 뒤집혔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채더라고요. 난리가 났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제 잘못이 분명했으니까요. 그 사람이 누구냐며 뻔뻔하게 정당방위라고 했으니 상황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어머님께 고자질한 사실도 들키게 되었고요. 집안이 시끌벅적했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났고, 아내는 아내대로 성이 났고, 어머니는 당신대로 화를 내고. 내 모든 것이라고 했던 집이 어느 순간 잠시도 쉬지 못하는 지옥으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것입니다. 되찾는다, 그게 가능했겠습니까? 일기 속 그 사람은 끝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때 일기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뒤늦은 후회를 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원흉이 저인 것만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요? 솔직히 지금 그걸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다 끝난 일인걸요. 그 사람 잡아 법정에 세운다 한들 아내가 살아나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 부질없다는 생각입니다, 부질없습니다. 아니, 들어보세요. 자기 아내 일기에 낯선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걸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호칭까지 합니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지요. 그런데 더 비참한 건 뭔지 아십니까? 마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고민했다는 점입니다. 비참했습니다. 이런 말이 여기서 맞을지 모르겠는데,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이었습니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빼냈던 겁니다. 결국 많은 것이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제게 가족, 가정은 전부였습니다. 가족이 있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근본적으로 흔들린 겁니다. 근본적으로 말이죠.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보면 짜증이 났고 집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다른 사람 집 같았습니다. 딸 아니었으면 진짜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고충을 누가 알겠습니까? 짊어질 수밖에요. 답답한 마음에 누구냐, 그가 누구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냐.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만은 지키고 싶다. 당신이 그렇다 해도 나는 그렇지 않다. 본인 딸 생각해 보았냐 했더니 울음을 터뜨리더라고요. 지난 석 달을 그런 식으로 보냈습니다.
틀어지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쉽고 억울한 게 사실입니다. 남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져 모든 게 뒤죽박죽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를 두 번 잃은 못난 놈이 되었습니다. 정말 못난 놈이죠. 자초한 게 아닐까 자책까지 하게 됩니다. 죄다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쌓은 게 일순간 무너졌습니다.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딸 때문에 그러지도 못합니다. 어머니께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먼 일이었으면 싶습니다.
그게, 관련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 번은, 아. 한 번은 아내 친구라 해서 집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기억 안 나고, 가끔 얘기하던 그 친구이겠거니 했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했더니 얼버무리더라고요. 뭐지 싶었는데, 아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 덜컥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뭔데 참견이냐고 소리를 질렀던 겁니다. 놀라 도망치듯 나갔습니다. 감추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아내와 또 한바탕 해야 했습니다. 일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못나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져갔습니다. 그야말로 막장이었죠. 언제 폭발할지 몰랐습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다 하고요. 해서 안 될 것까지 말이죠. 가족이라는 굴레에 파묻히고 만 것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 제 심정이 시원섭섭합니다. 미친놈인가 싶겠지만, 짐을 던 기분입니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런 심정입니다.
죄송합니다, 괴롭네요. 어머니요? 그게 참. 평생을 그렇게 살다 보니. 못 나 보이죠? 저도 알고 보면 기구합니다. 어려서 아버님 잃고 어머니 의존해 살다가 가정 꾸렸지만 실상 독립하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온 겁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나이 사십이 넘었는데. 그리고 이제 아내를 잃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막막할 따름입니다. 아내하고 어머니 관계는 좋다고 할 수 없었는데, 일기 건으로 골이 더 깊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어머니가 집에 발을 끊은 지 꽤 되셨습니다. 얼굴 맞대는 게 서로에게 고역이고 가시방석이었으니까요. 왕래를 하지 않는 대신, 심하다 할 정도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본인은 그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아내가 그걸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상황에 제가 기름을 부은 격이죠. 상황이 극에 달했습니다. 설움에 복받쳐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저는 저대로 힘들었고요. 폭풍전야, 하루하루가 폭풍전야였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죠. 그러면 저는 아내에게 묻게 됩니다. 누구냐, 그가 누구냐. 돌아오는 건 침묵뿐.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안팎에서 목을 조르는 심정이라고 할까요. 더는 분쟁이 없겠죠. 지옥 같았습니다. 영혼이라도 팔 수 있으면 팔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남 탓을 하게 되네요. 천하의 못난 놈입니다. 어머니 쫓아내고, 아내 떠나보내고, 딸 눈에 피눈물 나게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이 행복했던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도 잘 안되고 해서 딸이나 볼까 싶어 학원 근처에 있다가 집으로 갔던 겁니다. 학원에서 산책로가 가까운 편일 겁니다. 다섯 시쯤. 예, 다섯 시였습니다. 일기에 나온 그 사람, 왜 안 그랬겠습니까? 누구든 그러고 싶어 했겠죠. 그 사람이 누굴까? 어떤 존재일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따라다닐 수도 없는 것이고, 도청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머릿속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욱 듣고 싶었던 거죠. 말 한마디면 끝나는 거니까요. 제 속이 어땠겠습니까? 누구도 모르죠. 아까 그 친구라고 하는 사람 말고 딱히. 메신저 친구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다일 겁니다. 제대로 답변드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신 차려야 하는 데 쉽지 않네요.”
- 시어머니
“고생하시네요. 진전이 좀 있나요? 그렇죠. 애 많이 쓰시고요. 이래저래 폐 끼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며느리가 그렇게 떠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수고 많으십니다. 아니에요. 항상 고마운 마음입니다. 큰일을 당하고 나니 정신이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가엽죠, 가엽기만 하겠습니까. 잘 되기만 바랐는데, 이런 변고가 있었으니. 단란한 가정, 도란도란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요. 며느리지만 딸 같이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정성이 부족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남들은 모를 겁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요. 며느리는 이름만 며느리지, 제게 딸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니, 딸이었던 거죠.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만큼은 정상적인 가정을 갖기 바랐고, 반려자인 며느리 역시 각별한 마음으로 대했죠.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가 봅니다. 매일 통화했죠. 며느리야 할 일이 있으니까 제가 주로 걸었죠. 그럼 얼마나 살갑게 받는지, 누구보다 저를 챙겨주었어요.
아, 그거요. 이제 제가 손 놓을 때, 떠날 때가 됐다 싶어서 독립하겠다고 한 거죠. 아들이 가장이잖아요. 언제까지 신경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비록 따로 살지만, 한 가족이었죠. 아들하고도 매일 전화를 하니까요. 자잘한 일까지 다 얘기해주고 하니까, 별 차이는 없었던 거 같아요. 그만큼 제가 챙겨주고, 관여도 하고요. 자상한 어머니, 자상한 시어머니가 되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죠. 며느리가 이렇게 된 게 그래서 더 제 탓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요. 아들이 전화해줬어요. 기구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렇게 자상하던 며느리가 목숨을 잃다니요, 지금도 얼굴이 아른거려요. 남의 집 귀한 딸,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다니요.
안부 묻고 애들 얘기하고, 그런 식이었어요. 손녀가 고 삼인지라 신경 쓰라고, 아들 요즘 힘들어하는 거 같으니 챙겨 먹이라고, 이런 거였죠. 고민이라, 고민? 며느리가 고민 털어놓은 적이 있었냐고 물으시는 거죠? 아니요, 그런 적은. 제게 아들 가정은 화목함 그 자체였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웃음이 떠나지 않는 집안. 그런 거였습니다. 특별한 게 있었겠어요, 그런 거 있었으면 제게 말해주었겠죠. 비밀이 없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엄마와 딸 같은 관계였어요. 아들이요?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제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지금도 엄마, 엄마 하거든요. 어엿한 가장인데도 의존을 좀 해요. 그래도 다 컸으니까요.
일기, 아들이 얘기하던 그거 말이죠? 그게 말이 돼요? 며느리가 어떤 애인데. 말이 안 되죠. 제가 그랬어요, 괜한 거 의심만으로 그렇게 부풀리면 큰일 난다고요. 그럴 애 아니니까 다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요. 며느리의 한을 풀어주세요.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은 애예요. 원한 살 일도 하지 않았고요. 어쩌다 그런 곳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억장이 무너지네요. 부탁드립니다. 굳이 말씀드릴 게 있다면 아파트 상가에 편의점이 있거든요. 거기 사장님하고 만나는 거 몇 번 본 기억이 있어요. 아니요, 그것까지는 모르죠. 거기 파라솔 있잖아요? 거기서. 괜한 말 한 건지 모르겠네요. 거기 사장님이 두 분이에요. 남편 하고 아내. 남자 사장님 말씀드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