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외인 Apr 19. 2018

아이는 부모의 거울

- 유대와 애착이 필요한 아이 앞의 부모 역할

이제 다섯살 첫째 아이가 둘째 아이에게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 자꾸 그러면 혼나야겠네. 나 화 낼거다!!"


듣자마자 아연실색. 저건 내가 아이들을 혼낼 때 쓰는 문구 빼박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은 어른에게는 좋은 말이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좋은 말이 아니다. 거울은 좋고 나쁨을 구분하여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가 스펀지 같다고도 한다. 그 스펀지에 나쁜 물이 든다면? 생각해보면 우려할만할 일이다. 그런데 그 나쁜 물이 바로 아이의 아버지인 나였다면? 아이를 걱정하기 이전에 자신을 돌아보게 될 수 밖에 없다.



솔직히 아이의 긍정적 태도의 변화는 가정에서가 아니라 어린이집에서 다 배워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가정에서 부모가 해야할 일들을 어린이집에서 다해준다. 그리고 내 어릴적 골목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또래와의 교류도 어린이집에서 다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곁을 지켜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그나마 곁을 지키는 시간도 수면 시간 10시간과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 8시간을 빼면 6시간 남짓이다. 어린이집 등원 전 1시간,  하원 후 잠자기 전까지 5시간. 평일 아이와 내가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내가 퇴근이 조금 늦으면 한 시간이 줄어든다. 교사이기때문에 그나마 나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기보다는 부정적 영향을 더 많이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필요하고 좋은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불필요하고 나쁜 것은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이의 본성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긍정적인 태도로 아이와 만나야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짜증썩인 부정적 에너지를 쏟게 된다. 6시간 중 5시간 50분을 긍정적 태도로 일관하다가도 10분간 부정적인 태도로 아이를 만나면 아이는 그 10분간에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를 대할 때 더 피곤해지고 신경이 많이 쓰인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물리적으로 돌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이와의 정서적 유대감, 애착 관계 형성이 주요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이런 정서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에너지들을 유지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아이에게 온전히 에너지를 쏟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온전히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예전에는 동네라는 이름으로, 거주지 인근의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아이들을 봐주는 문화가 분명히 있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자랐던 80년 대만 하더라도 동네에서 또래를 만나며 자랐고, 동네의 어르신들의 관심도 받았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보호도 받았다. 그런 내 아이를 집 밖에 내놓아도 안심이 되는 신뢰의 공동체인 골목, 동네, 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요사이는 그런 문화가 없거나 축소 되었다. 그러면서 육아는 온전히 한 가정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물질적 복지의 혜택은 분명 늘었다. 하지만 정서적 육아의 몫은 부모와 가족의 것인데 그것을 온전히 감당할 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가족 문화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회문화적인 변화들, 한국 사회만큼이나 요동치는 큰 편폭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은 곳도 많지 않으리라. 그러한 변화들 중 물론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긍정적 요소가 빛처럼 빛나기도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유소년기 시절의 정서적 유대감 형성과 안정을 경험하지 못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에게 분명 어떤 식으로든 어두운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그리고 어른은 아이에게 그 사회를 반영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는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자,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점쟁이의 구슬이다.


아이는 그 사회의 투영이다. 그 아이의 신체적 성장과 정서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조건이 부모를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적응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게 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하루 6시간도 안되는 부모와의 시간을 보내면서(교직이어서 그나마 6시간이지 일반 회사원이라면 훨씬 줄어들겠지) 자라나는 아이들이 올곧게,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를 고민하는 부모 역할의 적응 문제. 


우리 부부에게 온 세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그것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이다. 부모되기는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자아 성찰의 시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성찰은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를 벌써 파악한 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