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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Jun 03. 2019

아이에게 배우는 비폭력 대화

어쩌면 이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첫째 아이가 이제 6살이다. 근데 둘째와 셋째가 4살, 2살이다보니 이 녀석이 상대적으로 커보인다. 간혹 이 녀석이 6살이란 것을 잊고 말할 때가 있다. 고등학교 교사의 언어 습관이 나온달까? 고등학생도 요사인 잘 못알아먹는 내 화법을 6살 꼬맹이에게 하고 있다니! 첫째의 다른 친구 중 막내가 있는데 그 아이의 부모가 보여주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부모의 태도에 아마도 첫째 아이는 혼란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요사이 녀석이 자주 투덜거리는 말 중에 "나한테만 그래"라는 말도 아마 그 연장선이 아닐까한다. 


어제는 오랜만에 저녁 놀이를 나갔다. 하도 자전가 타고싶다고 졸라서 아파트 내에 있는 우레탄 공터, 아이들 표현으로는 일명 "녹색 마당"에 셋이 함께 갔다. 그런데 우연히 둘째의 친구가 그 시간에, 그곳에 나타난거다. 반갑게 저희들 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함께 노는데 첫째도 더불어 신이 났다. 맨날 동생하고 집에서 노는 것도 재미없었던 것 같다. 오버를 하면서 둘째의 친구와 아버지에게 같이 놀아달라는 듯 계속 말을 붙이고 뭐라고뭐라고 듣기를 바라는 듯한 혼잣말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첫째와 달리 둘째는 씽씽카를 타고 있었는데 둘째 친구도 그것이 부러웠는지 집에 있던 어머니를 소환, 씽씽카를 가져와서 함께 탔다. 혼자 자전거를 타던 첫째는 동생 둘이 어울려 씽씽카를 다는게 부러웠던 모양인지 둘째에게 갑자기 씽씽카 타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보여준다. 


그렇게 한창을 놀다가 둘째 녀석이 반항을 하자 첫째가 화를 내며 둘째의 뺨을 한 대 때렸다. 바로 첫째를 불러다가 이유를 물었다. 울먹울먹 눈가에 눈시울이 드리운 녀석에게 화가 났냐고 물어보고, 동생에게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우물주물 동생이 말을 안들어서 한 대 때렸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도 되는거냐는 물음에는 우물쭈물 안된다고 말하며 주눅 들어 대답했다. 아빠 화내는 거 아니라 알려주는 거라고 말하면서 왜 그랬냐고 물었다. 당연히 자기가 화가 나서 그랬다는 대답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녀석이 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혼자 놀고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아서 그랬어요."


화가 나서 때렸다는 말이 아닌 저 말을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어서 놀란 것도 있지만 저 말은 비폭력대화에서 말하는 욕구에 대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습해도 되지 않고 연수를 듣고 다니고 책을 읽으면서도 잘 되지 않는 것인데 이제 갓 6살 난 녀석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기술적으로 익히는 인간 관계에서 필요한 것들, 사회적 기술이라는 것들이 이미 내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새롭게 배운 것이 아니라 꺼낸다는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폭력 대화에서 말하는 관찰, 느낌, 필요/욕구, 부탁의 요소들 중 사실 난 욕구를 들여다보고 표현하는데에 무척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순간  내 욕구인지 타율화된 욕구인지, 그것이 욕구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욕구를 알아채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놀라웠다. 한편 그러한 아이도 어쩌면 나처럼 유치원, 학교 속에서 관계맺기와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능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육이라는 것, 양육이라는 것이 내가 속한 사회의 규범과 질서, 그리고 관계맺기 방식의 내면화를 사회의 요구와 필요에 맞게 강요하는 행위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능성과 잠재성을 파괴하고 재단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통해 지금은 이른바 어른이라는 물리적 사회적인 겉으로 보이는 역할을 하는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역시 어른들이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들 또한 어른들을 키우는 존재이다. 또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매 순간이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쉽사리 주변에 동화되어 흘러가버리면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그걸 깨닫는 순간은 이미 늦은 순간이 될테니. 아이는 내 앞에 결과로 존재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내 앞에 결과로 존재하는 아이가 왜 그런 결과로서 존재하는지를 감지하고 이유를 모색하는 한 최소한 나쁜 부모가 되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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