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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Mar 11. 2023

소속감에 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나라엔 이제 안 들어올 거야?"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사람들 만날 때마다 한 번씩 들었던 말이야. 뭐, 사실, 이번뿐만 아니라 예전에 한국에서 사람들 만날 때에도 꼬박꼬박 듣긴 했었지. 번번이 대충 둘러대고 말았지만 말이야. 근데 내 또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계속 교분을 이어가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내가 아마 캐나다에 계속 눌러살게 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웃기게도 그때 당시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더라. 이번에는... 어쩐지 매우 수긍하는 분위기였고. "근데, 우리나라는... 참... "으로 시작되는 성토가 이어지기도 하고 말이지.


한국 사회에 대한... 정말 아무 말도 안 하려고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참 어려워. 사실 난 이제 완전 국외자 입장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눈길이 가고 관심이 가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가족과 친구들이 살고 있어서? 가족은 그렇다 치더라도 친구들과는 평소에 연락 한 번 안 하고 살면서 그래. 한국어가 영어보다 편해서? 그래서 한국 뉴스나 소식들을 캐나다 현지 뉴스보다 많이 접해서? 서구음식보다 한국 음식이 더 내 입 맛에 맞아서? 그럴지도 몰라. 태어나고 30년 동안 살았던 곳이라서. 성장기와 20대의 기억들이 남았던 곳이라서. 내가 살아온 인생의 반 이상이 아직 연결되어 있는 땅이라서. 그래서 의식적으로 안 하려고 해도 자꾸 걱정과 관심이 가는 걸 거야. 이미 국적은 포기해서 선거권도 없지만 말이지.


어쩌면 마음 속 한 켠으로는 나중에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종종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고는 해. 내가 만일 창작활동을 다시 하게 된다면, 그게 캐나다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한국에 관한 이야기일까? 반대로 말하자면 주 소구대상층이 한국인일까? 캐네디언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명확해. 주저하지 않고 튀어나와. 내가 영어보다 한국어가 편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물론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나는 한국이 더 재미있어. 캐나다보다. 그리고 한국이 더 슬퍼. 캐나다보다.


내가 살고 있고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이 캐나다 땅에서 150년 전에 원주민 소년 소녀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집단 학대와 학살 사건보다, 현재 한국 땅 노동현장에서, 실습현장에서, 그리고 사회적 참사 현장에서 어이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 더 마음이 쓰여. 미쳐버린 집 값 때문에 지역사회에 정착을 못하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주하는 밴쿠버 젊은이들에 대한 걱정은, 반 정도는 내가 늙었을 때 이 사회에서 날 부양해 줄 납세자를 찾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이 겹쳐있지만, 마찬가지로 미쳐버린 집 값 때문에 아이를 안 낳고 결혼을 못 하고 연애를 못 하는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그냥 백 퍼센트 죄책감만 느껴. 조금이라도 살기 편한 나라로 만들어 볼 생각 안 하고, 그냥 포기하고 도망나온 것에 대해서.


한국에 살면서, 참 한국 사회 욕을 많이 하고 살았어. "아오~ 씨바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돼..."로 시작하는 수많은 투정들. 그리고 그 투정들만큼이나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 거기에 따르는 희생이나 반발, 부작용 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부도 했었고. 그런데 그런 건 하면 할수록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바꾸는데 과학이 지배하는 구역은 무척 초라한 것이 아닌가'하는 회의만 들었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한국의 전통적인 인간관계 - 장유유서나 집단주의와 같은 - 를 존중하면서 사회를 바꿔나가기엔, 난 사실 저런 걸 친일파나 군바리,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싫어했었거든. 변혁운동을 한다면서도 나이나 성별을 바탕으로 상대의 의견을 지배하려 들고, 노동쟁의 중에도 남편과 아이 밥 차려주러 빠지려는 여성 노동자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머리가 터지도록 복잡한 서울도 싫었지만, 지방에 갔더니 저런 한국식 인간관계가 더 공고한 걸 보고 완전 학을 떼었었지. 그러다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났고, 두 말 없이, 추호의 고민도 없이 이민을 오게 된 거잖아.  


이민 첫 해, 한국에서는 소탈한 웃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기존 기득권 그룹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많은 걸 바꿀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어.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기대를 했었지. 그가 친기업적이고 "국익"이라는 어젠다에 매몰되어 있는 옛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적어도 상식은 통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한국을 떠나자마자 들었던 뉴스는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얘기였어. 그리고 그때, '이걸로 끝. 이제 한국에 완전히 정을 떼자!' 하며 마음을 먹었었던 거야. 이후로 그 결정이 그게 북핵위기 해법과 결부된, 부도덕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그런 뒷사정을 들었고, 또 당시 의회에서 기립박수를 받아가면서 이라크전 불참을 결의했던 장 크리스티앙 캐나다 총리의 선언과는 달리, 캐나다 군이 비밀리에 미군과 공조 작전을 벌이고 살상무기도 보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래도 마치 삐친 것 같은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었어. 어떤 범죄집단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난민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


그러고는... 음... 사실 살기 바빴지 뭐. 첫 직장을 잡으려고, 혹은 직장을 옮기려고 주말마다 이력서를 쓰고, 생활고를 개선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이 이민자의 땅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하면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바다 건너 저 편 땅에서 수많은 셀럽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전직 대통령이 자신을 던지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한다며 시청 앞 광장을 촛불로 채운 일에도 무감각했었던 것 같아. 아직은 그냥, 다 싫었어. 지긋지긋했어. 그리고 이런 동족혐오감은 밴쿠버에 자리 잡은 다른 한인 이민자들 역시 대상이 되었던 건지, 굳이 이곳에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졌어. 세월호


그날도 여느 때처럼 출근을 하고 컴퓨터 수리를 하고 매장에서 판매를 돕고 했었는데, 누군가가 CNN 뉴스 생방송을 전시용 컴퓨터 모니터에 틀어 놓았더라구. 그 커다란 배가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그 안에 아이들이 뭔가 할 겨를도 없이 갇혀있는 걸 생방송으로 봤지. 한국 뉴스를 본 아내는 '전원구조'라는 한국 언론 발표를 전해주었고 난 그걸 간절하게 믿고 싶었어. CNN이 한 발 늦는구나. 이미 다 구조가 되었는데, 이렇게 자극적인 뉴스만 보내고...라고 투덜대면서 말이야. 그런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지만 말이야. 그렇게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그리고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씨랜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단지 "씨바! 이래서 내가 이 나라를 떠나는 거야!"라고 비겁한 소리만 했던 나 자신이 증오스러웠어. 그리고 지금도 아무것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나 자신이......


지난해 발표한 두 책은 사실 모두 캐나다에 관한 거였어. 하하하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캐네디언'이 주 소구대상이라고 자조했었지. 캐나다 이민 1세대 이야기, 캐나다 비씨주 캠핑 이야기 등. 온라인에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소고도 가끔 남기기도 했지만, 그걸 책으로 묶어 내고 싶진 않았어 . 내가 뭐라고. 내가 그런 자격이 되냐고. 한국에 귀화한 탈북자들이 가끔 북한 사회에 대해 얘기하는, 그것도 북한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느낌이잖아. 물론 자기 한 몸이라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일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도망쳤다는 건, 여전히 그것만으로도 훌륭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자기는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자신이 버린 나라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좀 너무 뻔뻔스러운 것 아닌가 하는 거지.

 

하지만, 어느 날,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세월호 추모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곳 대학교 방송국 학생이 오더니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 거야. 뭐, 어차피 한국의 사회적 참사를 알리려고 거리로 나온 거니까 하자고 했었지. 그런데 말미에 그렇게 물어보더라구.


“그래서… 혹시 캐나다 정부가 이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해줬으면 하는 건 없니?“


이 얘길 듣는순간, 엄청나게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어. 무척 불쾌했는데 왜 불쾌한 건지도 모르겠고, 스스로 캐나다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몹시 자존심 상하고, 괘씸하고, 니깟 것들이 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면서 나온 말은 겨우, ”캐나다도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지역 사회문제가 많지 않을까?“ 였지. 그랬더니 그 리포터는 “그럼 도대체 왜 여기 나와있는 거야?” 라는 식의 눈빛을 보내더라구. 난 도대체 왜 거기 서있던 걸까? 아니, 그 전에, 나는 도대체 뭐였던거지?


지난 겨울부터 축구 비디오 게임을 시작했어. 알다시피 난 공놀이에 잼병이었잖니. 특히 축구는 국민학교 이후로 잘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군대에서도 짬 차고 나서는 혼자 뒷 뜰에서 묵묵하게 농구 연습을 했었지. 그런 나한테 누군가가 새로 나온 축구게임을 선물했는데, 와... 이게 게임성이 대단하더라구. 주로 스토리텔링 위주의 액션 게임만 좋아하던 나에게는 신세계였어.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하고 하면 점점 더 포인트도 쌓고 트레이드가 가능한 선수도 갖추게 되고 하는데, 물론 유명하고 능력이 출중한 선수일수록 계약하는데 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해. 그런데 웃기는 건, 이 와중에도 난 '손흥민'이나 '박지성', '김민재'를 찾아서 스카우트하려고 하더라니까. 그들의 객관적인 능력치랑 상관없이 말이야. 지난 월드컵 시즌 동안에는 이 게임에서 월드컵 특집으로 국가대표팀을 운용하면서 가상 월드컵 게임을 할 수 있게 했는데, 내가 제일 먼저 도전했던 팀은 아니나 다를까 한국팀이었어.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우루과이, 프랑스, 독일, 아르헨티나를 차례로 격파하고 월드컵 우승을 한 쾌감이란!


이쯤 되면 인정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난 한국 사회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삐쳐서 떠난 거라고. 그리고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선 계속 한국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고. 실력으로는 메시나 음바페에 절대 비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손흥민이, 이강인이 잘 성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국 클럽팀이 만에 하나라도 셍제르망을 이기는 날이 생기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쁘겠다고. 그리고 남북간에 긴장이 빨리 완화되어 주변국들에 의존을 하지 않고 떳떳한 의교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경제성장이나 노후대비, 최신기술보다, 세대 간의 긴장 완화와 사회통합, 안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그럼 언젠가는 다시 한국에 갈 거냐고? 솔직히 모르겠어. 지금은. 하지만 분명한 건, 한국에서 내 능력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납세자가 되지 못한다면 갈 생각이 없어. 내 나이가 어떻든 간에 말이지.


지난 달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시청 / 덕수궁 근처를 걸었던 적이 있어. 수많은 천막과 플랭카드 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멀미가 나더라. 그래도 뭐. 그들은 납세자니까. 납세자로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목소리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지. 그런데, 시청 앞 한 켠에 마련된 '이태원 합동 분향소'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무너지더라. 무전기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복 경찰들을 경계로 한쪽에서는 강제철거를 대비해 결의를 다지는 유가족들의 눈빛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온 가족이 함박웃음이 지으며 스케이트를 즐기는 모습. 약 백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는 그나마 두 계층의 삶을 지상도시와 지하도시로 나누었는데, 여긴 그냥 바로 양 옆이잖아. 같은 서울 시민인데도, 자신은 어처구니없이 아이를 잃었는데, 바로 옆에서는 온 가족이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을 목도하는 유가족의 심정을 도대체 가늠이 안 되는 거야.


결국 다시 궁극적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야. 한글로 글을 쓰는 내가. 대한민국 대표 포털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공간에 글을 올리는 내가. 한국사회에 삐쳤지만, 여전히 소속감을 느끼는 내가.


자식 잃은 부모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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