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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Oct 30. 2023

코리아 뉴웨이브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3

**** 이혁래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넷플릭스 개봉을 축하하며, 예전에 브런치에 연재했었던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를 재편집 / 연재합니다. <노란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거대한 라쇼몽의 용광로'라는 표현처럼, 이 글도 많은 부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류가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이렇듯, 상품 소비자이자 예술 전유자로서 관객들의 눈높이는 한껏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영화의 품질은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는) 그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영화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어? 한국영화 같지 않은데?" 였거든요. 외화 수입쿼터를 받기 위해 (그나마 장사가 좀 되는) 애로물의 프랜차이즈만 계속 양산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화면 '때깔'이 다르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었죠. 후시녹음 퀄리티는 아예 차치하고라도 말이죠.


뭐, 말할 것도 없이 주 원흉은 낮은 제작비, 그리고 (관성적인 작업 방식에만 매몰된) 당시 충무로 영화인력 때문이었죠. 특히 화면 '때깔'이라는 건 촬영 / 조명 기술이잖아요. 사실 모든 종류의 기술이라는 게 그렇겠지만, 촬영 / 조명은 정말 수많은 수많은 렌즈 및 조명 기기를 실제로 경험해보고, 반복연습하고 나서야 능력치가 높아지는 것인데 (스튜디오 촬영이 아니라 주로 오픈세트나 야외 촬영이 많은 한국영화에선 기후 변화도 체크해야 하고요), 요즘처럼 디지털로 찍는 게 아니라 필름으로 작업할 때는 그게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촬영 카메라 릴 돌아가는 "따르르르르르" 소리를 돈 떨어지는 소리라고 하던 때이니까요. 가끔 촬영 스테프나 조연 배우 때문에 NG 라도 나오기만 하면, 필름 값 물어내라고 하면서 욕지거리가 난무하고, 랏슈 필름 시사에서 누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야! 너 깐느 갈 거야?" 하면서 핀잔주던 시대였으니, 새로운 렌즈나 조명 시스템을 필름 테스트해보겠다는 발상은 아예 꺼내보지도 못했던 거죠.


그리고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영세한 한국의 영화사에서는 영화를 제작할 때 보통 카메라나 촬영장비를 대여해서 제작했는데요. 그것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기에, (자동차 폭파처럼 두 번 찍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는 씬을 빼고는) 일반적으로는 달랑 한 대를 대여해 가지고 촬영을 했었죠. 두 배우의 격한 감정이 오가는 대화 씬도 (맞은편에서 상대 역이 맞장구만 쳐주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찍은 후 컷을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배우들 감정의 집중력이 그냥 도중에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죠. 2000년에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의 메이킹 영상을 보면, 송강호 배우가 눈에 불을 뿜으면서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치던 장면을 여러 차례 나누어서 촬영을 하는데요. 송강호 배우는 어떻게 이렇게 감정을 퍼붓는 장면을 나눠서 찍냐고 불만을 터뜨리더군요. 이렇듯 한정된 제작 예산의 문제는, 단지 화면 때깔뿐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작품의 퀄리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던 중, 이렇게 경직되어 있는 영화산업 현장에 급격하게 새로운 인력이 들어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이전에는 대학생 출신 영화인이라고 하면, 배우이자 감독인 하명중 감독을 빼곤 찾기 힘들었죠. 그만큼 영화판은, 뭐라고 할까... 야성적이고 거친 '딴따라' 노동의 현장이었는데, '이장호', '이두용', '임권택' 감독과 같은 거장 들 밑으로, 영화를 진지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특히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연출부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서,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과부춤>과 같은 한국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나 <바보선언>과 같은 작품은 당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한국사회를 자성해보고 싶어 하던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감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1975년에 시작된 하길종, 김호선, 이장호 감독의 영상시대 운동에 한국영화 특유의 도제 시스템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력들이 수급되면서 소위 '80년대 뉴웨이브'를 낳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장호 감독과 배창호 감독은 한해에도 두세 편씩 본인 연출작을 개봉을 하기도 했죠. 방송사를 퇴사한 후로는 여성 서사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던 박철수 감독,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를 바라보던 장선우, 박광수 감독, 한국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재정립한 강우석, 장길수 감독, 그리고 한국영화 화면 때깔에 혁명을 일으킨 이명세, 곽재용 감독이 8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988년 <성공시대 (장선우)>,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개그맨 (이명세)>,  <구로 아리랑 (박종원)>, <영구와 땡칠이 (남기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강우석)>, 1990년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황규덕)>,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명세)>, <남부군 (정지영)>,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곽재용)>, <우묵배미의 사랑 (장선우)>, <장군의 아들 (임권택)>,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장길수)> 등, 이렇게 개성이 다양한 작품들이 충무로에 쏟아져 나오면서 1980년대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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