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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Oct 30. 2023

시장 개방과 가정용 비디오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2

**** 이혁래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넷플릭스 개봉을 축하하며, 예전에 브런치에 연재했었던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를 재편집 / 연재합니다. <노란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거대한 라쇼몽의 용광로'라는 표현처럼, 이 글도 많은 부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류가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84년과 86년에 영화법 개정이 시행되면서 영화사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고, 87년부터 영화 수입 자유화가 됩니다. 수입 쿼터제의 부작용을 정부에서 발견하고 그걸 일소하려는 노력 때문은 아니었고요, 88년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미국 영화사들로부터 압박도 많이 받고 (이는 결국 88년에 미국영화 직배로 이어집니다), 가정용 비디오 시장을 열어보려는 국내 대기업에서도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가 많아서였겠죠. 어떻게 보면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이때쯤 되면 올림픽을 괜히 유치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을 겁니다. 해외의 이목이 집중되는 잔치를 집에서 벌이려 하다 보니까, 집 안에 흉 잡힐 게 너무 많았던 거죠. 


87년에는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도 있었는데, 올림픽 때문에 상주하는 외신기자들도 많다 보니까 정권도 지 성질대로 못하고 어떻게든 국민들을 달래려 했던 거겠죠. 이런저런 이유로 88년 올림픽 기간 즈음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명작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전 검열 때문에 개봉을 못하던 작품들을 해외 선전용으로 시범 상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복자 펠레>, <양철북>,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등 해외에서 인정받았지만, 몇몇 가지 이유로 개봉이 불허되었던 당시의 문제작들이 극장에 걸리면서, 이게 웬일인가 했었죠. 그리고 이때 소개되었던 작품들은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 몇 가지 수정을 마치고 정식 개봉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화 수입 자유화, 그리고 곧이어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네. 예전에는 해외여행도 정부 허가를 받고 갔었습니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던져주게 되죠. 서울 시내 개봉관들 중심으로 기획실이 생기면서 각 극장마다 수입담당이 직접 해외에 나가서 외화를 수입하게 되었거든요. 80년대 중반까지는 대개 설날과 추석에는 한국영화 혹은 (주로 '동아수출공사'에서 수입한) 성룡 영화, 나머지는 모두 헐리우드 네임드 대작 영화를 봤었고, 그게 아니라면 영화사 직원이 미군부대에 출입하거나 일본 잡지를 사서 보면서 외화를 수입했었는데, 외화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 수입업자들은 그야말로 다종 다양한 외화들을 미리 시사하고 나서 골라낼 수 있었던 거죠. 


관객 입장에서는 그동안 영화잡지 <스크린>이나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이름만 들어보고 꿈속에서만 그리던 작품들이 쏟아져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장논리라는 게 있어서 장사가 안될 것 같은 영화가 극장 개봉되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이때, 한국의 관제교육 시스템과 고질적인 정경유착이 반전을 이루어내죠. 바로 89년부터 KBS 제3TV (현 EBS)에서 방송했던 'TV 고교 가정 학습 (TV과외)'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프로야구나 미스 유니버스 등 여러 가지 포퓰리즘 정책을 폈는데, 그중 하나가 사교육을 금지시켜서 빈부에 따른 교육격차를 해소시키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노태우 정권 때에도 대학생 과외를 제외한 보습학원 같은 건 계속 금지되었었는데, 이때 대학입시용 TV 과외를 시작한 거죠. 그것도 문교부에서 방송의 일정 부분을 학력고사 문제에 반영하겠다고 공언까지 하면서요. 당시에는 '4당5락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라는 단어가 유행할 정도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입시공부를 지독하게 시킬 때였으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외 방송을 볼 시간이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가정에서 예약녹화 기능이 있는 VCR 기기를 구매하게 됩니다. 국내 VHS VCR 시장을 확대하려는 대기업의 이해관계가 한국 가정의 교육열과 잘 맞아떨어진 거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VCR의 정체성은 공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삼성 (스타맥스)>, <SK>, <대우 (우일영상, 시네마트)>, <금성 (미디아트)>과 같은 대기업에서 영화 비디오를 출시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한국 영화 산업의 본격적인 2차 판권 시장이 이때부터 시작된 거죠 (90년대 중반엔 한국 영화를 제작할 때 비디오 판권을 2~3억에 미리 선판매를 하기도 했어요. 94년에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이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제작비 '20억 원'을 들였다고 광고를 했으니까, 비디오 판권 3억은 작은 돈이 아니었죠). 각 기업에서 매달 10~20편씩 출시를 했는데, 이건 사실 한 해에 극장에서 개봉하는 작품 수보다 많았거든요. 당연히 컨텐츠가 부족하게 되었고 각 기업에서는 미디어 사업부를 만들어서 좋은 작품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극장 개봉작은 물론 서로 앞다투어 판권을 구매했고, 흘러간 명작에서부터, 소수의 영화광들만 숭배하는 '컬트영화'까지 떼거지로 출시되었죠. 그야말로 영화 감상의 '빅뱅'이 89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공륜(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당시 공륜은 등급심의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 극장 개봉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었죠. 당연히 수입업자들은 작품을 고를 때, 이게 이문을 남길 것인지도 고민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륜의 입맛에 맞을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구요. 당시 공륜의 등급 심의 기준은 섹스에는 무척이나 엄격하지만 폭력에는 매우 관대한 미국의 등급 심의와 취향이 비슷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수입업자 입장에서는 헐리우드 영화들을 수입하는 것이 여전히 가장 안전한 투자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영화광들은, 영화잡지나 영화 관련 도서, 방송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 자신의 선배들이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을 전전했던 것처럼, 해외 영화 불법 복제 비디오를 상영하는 '비디오떼끄'로 어쩔 수 없이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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