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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Oct 30. 2023

영화광 시대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1

누가 뭐라 그래도 80년대 말, 90년대는 한국 영화사 전체에서도 두드러진 "영화광 (Cinephile 씨네필)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전부터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에서 해외 명화를 찾아다니면서 보던 세대들을 지나서, 90년대 초에는 <영화공간 1895>니 <영화사랑>이니 하는 '비디오떼끄'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세계적 명화들을 불법 복제한 후 VHS로 공개 상영했던 영화모임으로, 서유럽 공공기관에서 정식 필름으로 운영하는 '시네마떼끄'에 비유해서 '비디오떼끄'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나 <서울영상집단>, <바리터> 등 독립영화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영화광들이 모여 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고 자신들의 해석을 붙여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로드쇼', '스크린'과 같은 영화 잡지들이 인기를 모으고, '씨네21'도 95년에 발간을 시작했고요. 특히 '로드쇼'의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 (이후 영화 잡지 '키노' 편집장)는 독특한 문체와 당시 서유럽 후기 구조주의 이론들을 소개하기도 해서 영화광들의 열광적인 신봉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면이나 방송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을 통해 '홍콩 느와르', '누벨이마쥬', '컬트무비'와 같은 단어를 유행시키기도 했죠.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중견감독과 제작 스테프들이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고 고백해왔습니다. 게다가 이분들의 활동기간도 그 이전 세대에 비해서 월등하게 긴 편이에요. 80년대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감독 들이나, 그 이전 영상 세대인 '이장호', '김호선' 감독의 경우 대부분 10년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상업영화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으셨지만 ('박철수' 감독의 경우 작고하시기 직전까지 독립영화에서 활동하셨지만), '김지운', '류승완', '봉준호', '최동훈', '박찬욱' 감독의 경우는 데뷔 이후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한국 영화 아카데미와 한국 영상원 등이 현재 한국영화 제작진들의 요람이 되어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해냈고, 또 80년대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이끌던 감독과 제작진들의 영화문법이 그다음 세대들에게 유전되어 전반적인 한국 영화의 질적 변화를 만들어 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80년대 말, 90년대 초라는 시기에, 왜 영화광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지는 우수한 영화교육 시스템과 개선된 도제 관계로는 설명하기 부족합니다. 


일단, 영화라는 상품의 특수성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이 상품의 가격 결정 시스템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죠. 30억 제작비의 영화나 200억 제작비의 영화 모두 동일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무한 복제가 가능한 영화매체의 특징 때문에 그럴 텐데, 영화라는 상품은 태초부터 제작자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각 나라 배급업자와 극장의 사정에 따라 가격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50억 불 제작비의 대작 헐리우드 영화가, 미국에서 상영할 때의 가격과, 일본에서 상영할 때 가격, 그리고 한국에서 상영할 때 가격이 모두 다 다를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때문에, 아무리 궁핍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극장만 있다면, 세계 최고 품질의 헐리우드 영화를 소비할 수 있었죠.


사실 70~80년대, 국가 경제 성장에 헌신하면서 살던 일반 노동자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가 생활 중에, 극장 관람이라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하기 쉬운 일이었거든요. 아니면 집에서 TV 앞에 누워 봉황기 고교 야구 중계를 본다든지 김일 천규덕 레슬링, 혹은 박종팔 권투 중계를 보는 일이었는데, TV 시청은 뭐, 언제나 오후에는 할 수 있었던 거였구요. 특별한 날 가족 서비스를 하고 싶은 가장들이 선택하기 가장 쉬운 게 극장 관람이었던 거죠. 독재정권이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해서 3S (Screen, Sports, Sex)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있을 테고, 또 당시 수입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적대하는 내용이 많았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노동자 가족들이 영화 관람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가격 정책을 폈을 겁니다. 


한국 영화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헐리우드 대비 고작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든 작품을 가지고 대작 미국 영화와 같은 가격으로 경쟁을 해야 하니 무척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영화 관객의 입장에서는 완전 횡재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80년대 한국에서는 중산층이라도 바나나 하나 사 먹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영화라는 상품에 있어서 만큼은, 머스탱을 몰고 출퇴근하는 미국 중산층과 버스를 타고 다니는 한국 서민이 같은 걸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개발도상국인 한국 시민도, 다른 전시 / 공연 문화 - 콘서트, 무용, 뮤지컬 공연, 미술 전시 등과는 달리, 영화만큼은 높은 수준의 작품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에서 영화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영화 제작은 도무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던 거죠. 일단 같은 가격으로 헐리우드 영화와 경쟁해야 하는 것도 무리수인 데다가, 한국영화 제작비가 아무리 싸다고 하더라도 외화 수입 가격보다는 비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싼 가격으로 미국 영화를 수입해서 개봉하는 것이 훨씬 이득인 셈이 되는 거죠. 하지만, 이 간단한 계산은, 정부에서 외화 수입쿼터 제도 (한국영화를 제작해야지만 외화 수입 허가를 받는 것)를 시행하면서 어그러지게 됩니다. 이 당시만 해도, 정부의 한국영화 진흥책은 당시 정권을 홍보하는 영화에 점수를 더 주고, 한국 영화를 안 만드는 회사에는 불이익을 주는, 이런 폐쇄적 방식에 머물러 있었던 건데요. 하지만, 이런 쿼터제도는 또 그 나름대로 부작용이 있어서, 영화사끼리 수입쿼터를 가지고 현금 거래를 한다거나, 또는,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중박은 터지는 변강쇠 류의 토속 애로영화를 양산하는 일만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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