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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01. 2023

새로운 사람들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5

**** 이혁래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넷플릭스 개봉을 축하하며, 예전에 브런치에 연재했었던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를 재편집 / 연재합니다. <노란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거대한 라쇼몽의 용광로'라는 표현처럼, 이 글도 많은 부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류가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여기에, 1970~80년대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영화 제작을 공부하기 위한 해외유학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선진 기술을 배워와서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런 인식이 많았었죠. 그걸 떠나서 대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가족과 사회에 부채를 지는 인식이 있어서, 대학을 졸업하면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학생 운동을 진압하던 경찰들의 주된 레퍼토리가 "이것들이... 부모들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학교 보내 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로 시작되었던 건, 바로 '대학생들은 사회와 가족에 빚을 지고 있고, 열심히 공부해서 갚아야 한다'라는 그 시대 인식을 반영했던 거죠. 하지만,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가고, 그걸 부모들이 지원해줄 수 있는 정도의 경제 능력이 한국사회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유학을 가서 연출을 공부하고 온 감독 (박광수, 홍상수, 임순례, 이광모, 이광훈, 곽경택) 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영화 기술 분야의 유학이 한국 영화의 때깔과 음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한국영화 엔딩 크레딧을 보면 영화 후반 작업 (편집, 녹음, 자막 등)이 항상 '한국 영화 진흥 공사'로 명시 된 걸 발견할 수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작사들의 선택지가 넓어지게 된 것이죠. 물론 '랏슈 편집' 후 기술 시사를 한 다음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으로 최종 편집하는 전통적인 선형 편집 방법에서, 컴퓨터에 캡처한 후 편집하는 Non-Linear (비선형) 편집 시스템으로 세계적인 추세가 바뀌게 되면서, 비교적 저비용으로 편집 스튜디오를 만들 수 있었던 영향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A&D 스튜디오의 이규석 실장과 같은 유학파들이 한국영화 후반 작업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은 건 무시할 수 없었던 거죠.


촬영 역시 마찬가지로미국이나 프랑스  당시 영화 선진국에서 유학하면서그들의 제작 시스템과 제작 장비들을 몸소 배워온 사람들이 충무로로 돌아오면서 한국영화의 화면을 바꾸게 되었죠특히 AFI 출신의 김형구 촬영 감독은 이전 세대 충무로 현장에는 없었던 DP (Director of Photography - 촬영과 조명을 통틀어서 영화 화면을 책임지는 사람시스템을 도입해서<닥터 >, <비트> 등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때깔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존 충무로 촬영팀과 조명팀의 반발이 심했다고는 합니다)하지만 이젠 충무로 출신 정정훈 감독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촬영을 리드하고 있으니 정말 세상이 달리지긴 했네요.


그리고, 1990년 <장군의 아들 (임권택)> 이 당시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그리고 그전에 <영웅본색>이 전국적인 흥행 열풍을 만들면서, 90년대에는 매해 꼬박꼬박 조폭 액션 영화들이 개봉하게 되었고, 또 그때마다 괜찮은 흥행 결과를 내곤 했었는데요. 문제는, 보통 조폭 액션 영화들의 경우 기존의 멜로드라마와는 달리 수많은 조연과 보조 출연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거였죠. 그래서 이때부터 충무로 감독들과 영화 제작자들은 대학로 연극무대를 뒤지고 다니면서 새로운 얼굴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물급 신인배우가 탄생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래도 극을 이끌거나 한 장면을 책임지고 장악할 수 있는 배우들이 이때 많이 발굴됩니다.


물론 김명곤 배우 등, 그 이전에도 연극무대 출신 영화배우가 없었던 건 아니었죠. 하지만, 아무래도 영화계와 연극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던 시대였어요. 무대에서 연극하시는 분들 생활이 너무 처참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무대연기자라는 자긍심 하나로 버티던 시절이기도 해서, 연극배우가 영화계에 진출하면 동료 배우들에게 배신자 낙인을 받기도 했었죠. 그래도, 조폭영화와 함께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90년대부터는 영화계와 연극계, 양쪽 모두 이익이 되는 연기 인력 공유가 시작됩니다. 현재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송강호, 황정민, 설경구 배우들이 바로 90년대에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넘어와 한국영화의 퀄리티를 한껏 높여준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 영화 아카데미를 빼놓을 수가 없겠습니다. 현재는 학교 교사 위치도, 학제도 변경된 것으로 아는데, 1984년 남산 영화진흥공사 청사 건물 구석방에서 개교한 후 90년대 초반까지는 연출과정만 있어서 감독 사관학교라고 불리기도 했었죠. 단 1년 동안, 집중적으로 영화 연출 기술만을 배울 수 있었던 거죠. 무엇보다 학비는 전액 무료였고, 지원자격에 나이 제한이 없어서 처음에는 영화 현장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 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허진호, 임상수, 봉준호, 김태용, 최동훈, 장준환 감독 등.. 영화 아카데미 출신 중, 현재 한국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자면 끝이 없죠.


영화 아카데미가 성공하게 된 요인을 보자면, 뭣보다 도제 시스템에서는 할 수 없었던 모든 걸 할 수 있었다는 걸 들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영화 제작현장에서 서열이라는 게 무척 엄격해서 새로운 의견이나 문화를 수입하는 게 불가능했었거든요. "스크립터를 3년 해야 세컨드(조감독)가 되고, 세컨드를 3년 하고 퍼스트, 퍼스트를 3년 하고 나야 비로소 감독 입봉을 한다"는 속설이 있을 때였죠.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인 감독이 경력이 많은 촬영 기사의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는 건 웬만한 배짱으로는 못하던 일이어서, 보통 신인 감독들은 연기자들을 보고 연출을 하곤 했어요. 감독 의자 앞에 아예 모니터가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던 현장 편집 시스템을 처음 만들어낸 현재의 한국 영화 촬영 현장을 생각하면, 저 시대 충무로에는 정말 웃기는 관습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이전에 현장 경험이 있든 없든, 영화를 배운 적이 있든 없든, 나이가 몇이든 간에, 모두가 같은 자격을 가지고 모여서 1년 내내 영화에 대해 생각과 논의를 하고, 최신 촬영 장비를 직접 만질 수 있었던 건, 당시 영화광 청년들에게 엄청난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 영화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어떤 조직 (사회)에서 차별을 없애고,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 그 조직 (사회)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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