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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01. 2023

정보 독점의 종말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6

**** 이혁래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넷플릭스 개봉을 축하하며, 예전에 브런치에 연재했었던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를 재편집 / 연재합니다. <노란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거대한 라쇼몽의 용광로'라는 표현처럼, 이 글도 많은 부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류가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예전에 영화 프로듀서 일을 준비하던 어떤 선배가 어느 날 제게 와서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자랑을 하더군요. 이제 자긴 충무로 제작부장으로 입봉 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서 엄청나게 두꺼운 명함집을 보여주는데, 그곳에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모든 관계자 및 충무로 업체들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뭐... 사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하나 도모하려면, 관련된 사업의 '담당자'를 찾아내는 게 가장 힘든 일이긴 하죠. 그래도 예전의 충무로는 너무나 정보 공유에 폐쇄적이어서, 저 정도 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곧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대변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제작팀을 하나 구성하는 일에도 기존의 인맥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만 일할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대기업이 영화판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폐쇄된 사회도 어쩔 수 없이 주먹구구식 관행을 정리하고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부터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새로운 인력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죠. 90년대 말에는 해외에 유명한 작곡자나 오케스트라를 캐스팅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무척 저렴하다는 사실에 많은 제작자들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한 인력들 입장에서도 굳이 도제 시스템에서 수업을 하고, 인맥을 만들고, 그렇게 자기 이름을 알리지 않더라도, 이제 여러 가지 방법 - 단편영화, 포트폴리오 웹사이트 등 - 으로 상업 영화계에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해외여행 자율화와 가정용 비디오 시장이 불러들인 대기업, 그리고 PC통신과 인터넷 덕택에, 충무로 영화 정보가 쉽게 공유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영화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합해 보면, 영화 예술에 대해 고민하던 소규모 영화 단체나 대안영화를 꿈꾸던 영화 운동 단체 출신들, 한국 영화 아카데미, 그리고 유학파와 대학로 연극 무대 출신 배우들이 기존의 한국 영화 도제 시스템에서 성장한 인력들과 서로 어울리고 보완해 가고, 여기에 급격한 정보 공유 시대를 맞이하면서 1990년대 한국 영화는 "한국영화 같지 않다"라는 칭찬이 무색할 정도의 품질로 성장하게 됩니다. 김의석 감독 <결혼 이야기 (1992)>강우석 감독 <투캅스 (1993)>, <마누라 죽이기 (1994)> 까지는 긴가민가 했었던 상업영화로서의 완성도는, 1995년 <닥터봉 (이광훈)>과 1996년 <은행나무침대 (강제규)>에서 헐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기, 연출, 촬영, 후반 작업 등 모든 부분에서 월등하게 상향된 품질 관리 능력으로 인해, 감독들의 참신한 시도가 실패로 이어지는 확률을 확연하게 줄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986년에 한국 영화 최초로 파나비전 카메라를 사용한 영화 <황진이 (배창호)>라든지 현재 세계적인 명성을 안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 (1992)>은 개봉 당시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했지만, 2000년에 한국 영화 최초로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는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하게 된 것이죠.


기초적인 장르적 완성도를 확보한 한국 영화계는 90년대 중반 이후 <여고괴담 (서울 관객 62만)>, <주유소 습격사건 (서울 관객 90만)>, <쉬리 (서울 관객 240만)>, <공동경비구역 JSA (서울 관객 250만)>에서 폭발적인 흥행 능력을 확인하면서 좀 더 다양한 도전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2003년을 한국 영화 최고의 해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죠.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로 칸 그랑프리를 거머쥔 <올드보이 (박찬욱)>, 스릴러 장르를 재해석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정통 멜로드라마 <클래식 (곽재용)>, 공포영화 장르에 품격을 더한 <장화, 홍련 (김지운)>, 그리고 모든 장르를 혼합 재구성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받은 걸작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그리고 '천만 영화'라는 수식어를 처음 갖게 된 블록버스터 <실미도 (강우석)> 등... 한국영화사에 남을 영화들이 한 해에 한꺼번에 개봉했던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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