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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Oct 31. 2023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4

예전에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애정만세>의 감독 차이밍량과 인터뷰를 하면서,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죠. 차이밍량 감독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었다고 해요. "나쁜 영화는 지구를 구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개인의 내일에 집중하는 영화다 (건너 건너 들은 얘기라서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판박이와 같은 수많은 할리우드 액션 히어로 영화들이 지구의 종말을 막는 내용을 담고 있고, 소위 '예술 영화'들은 개인의 권태나 불안을 다루고 있는 걸 보면 딱히 반박하기 어려운 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삶과 고민이 사회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걸 또 생각하면, 마냥 개인의 삶을 다룬 관념적인 내용만이 예술인가 싶기도 하죠.


여하튼, 오랫동안 영화가 흥행 산업의 하나로서만 역할을 해오면서, 정부 정책홍보나 반공의식 고취, 그것도 아니면 외화 수입쿼터를 위한 의무제작의 일환으로서만 역할을 해왔던 한국 영화계에서도,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의 '영상시대'처럼 영화를 예술로서 접근하자는 움직임은 무척 고무적이었습니다. 이런 운동의 뒤를 이어서,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무검열) 예술 영화들을 서울 주재 프랑스, 독일, 일본 문화원을 전전하면서 관람하며, 또 그걸 같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모임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죠. 이때, 유현목 감독과, 전양준, 신철, 안동규, 정성일, 이정국, 전찬일과 같이 현재 한국 영화계 중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많은 분들을 중심으로 독일문화원 후원을 받아 78년에 창립된 0세대 영화동아리가 바로 <동서 문화 연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서문화 연구회의 짧은 활동기간의 뒤를 이정국, 전찬일, 박찬욱의 <영화마당 우리>가 잇게 되었습니다. 이들 영화모임들은 영화서적 번역, 상영회, 학술지 편찬, 단편영화 제작과 같은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한국 예술 영화에 대한 꿈을 꾸었고 이후 영화마당 우리의 명맥은 <영화공간 1895><영화공간 씨앙씨에>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1980년 광주는 그걸 실시간으로 방관만 해야 했던 모든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에게 커다란 무력감과 부채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수치심과 죄의식 때문에, 그리고 공안정국의 검열 때문에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대체, 뭣 때문에, 저들은 시민들을 학살까지 해야 했을까..?" 라는 기본적인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되었죠. 그리고 동시에 대학생,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식의 영화 제작과 배급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고발하자는 운동이 생겼습니다. 장선우, 박광수, 김홍준, 홍기선 둥 서울대 영화 써클 '얄라셩' 멤버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서울 영화 집단>은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아메리칸 뉴시네마 등 영화사적으로 굵직한 자취를 남긴 대안영화들뿐만 아니라, 제3세계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들 역시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을 했었죠. 영화마당 우리에서 출판한 영화 시나리오 번역 / 연구집 <극복의 영상들>이라는 책에 소개된 영화들이 <욜>, <택시 드라이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애니홀>과 같은 작품이었다는 걸 고려했을 때, 서울 영화 집단이 발간한 영화서적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와 비교해 보면, 새로운 한국영화를 꿈꾸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발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치 "개인의 내일에 관심을 두는 영화와 인류 사회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영화를 각각 추구하는 것처럼요. 이후 서울 영화 집단은 서울 영상 집단으로 바뀐 뒤 몇 차례 진통을 겪고 나서, 1990년에 홍형숙, 남인영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울 영상 집단> 거듭나게 됩니다.


서울대 영화 써클 '얄라셩' 이후 속속 등장한 고려대 '돌빛', 이화여대 '누에', 경희대 '그림자놀이'를 중심으로 '대학 영화 연합 (대영연)'이 만들어지고, 이들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또, '노동자 문화 예술 운동 연합', '여성 영상 창작 집단 바리터', '노동자 뉴스 제작단', '서울 영상 집단', '영화제작소 장산곶매'에 흡수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 현장을 VHS 테이프로 공동 촬영해서 서로 영상 소스를 공유하며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편집장비를 빌려쓰기도 했습니다. 영화 <노란문>에서 소개된 카메라 '히타치 8200 (Hitach VM-S8200)'이나 당시에는 유일하게 프레임 단위 S-VHS 어셈블리 편집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빅터만 (JVC HR-S10000)'은 모든 VHS 영상 제작 단체들의 선망이 되기도 했었죠.


또한, 1990년 장산곶매 <파업전야>를 전국 상영시 경찰의 상영저지와 필름 탈취 공작을 공동 방어하기도 하면서 독립 영화 단체들 끼리 결속력이 강해지기도 했었고, 한편으로는 한 사람이 여러 다른 팀에 같이 적을 두기도 하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영화 아카데미나 충무로 현장에 같이 진출해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넣기도 했습니다. 한양대 영화 써클 '소나기' 출신의 장윤현 감독공수창 감독은 이후 '장산곶매'에서 이은, 장동홍, 이용배, 홍기선 감독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가, 이후 각각 <접속>, <알포인트>등으로 한국 상업 영화계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식이죠. 이렇듯,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8~90년대 영화 운동의 인력들이 충무로에 진입하면서, 충무로 상업영화 창작은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서울 영상 집단처럼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계속 활동하는 영화 운동팀도 있지만요.






함께 읽기 좋은 글 :


성하훈의 <한국 영화 운동 40년> http://omn.kr/1qg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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