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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02. 2023

콘텐츠 산업과 기획영화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7

**** 이혁래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넷플릭스 개봉을 축하하며, 예전에 브런치에 연재했었던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를 재편집 / 연재합니다. <노란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거대한 라쇼몽의 용광로'라는 표현처럼, 이 글도 많은 부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류가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아마도 그냥 늘 있었던 정례 보고 혹은 내각회의였을 겁니다. 당시 오인환 공보처장관 본인도, 1993년 어느 날,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그 한 마디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될 줄은 몰랐겠죠. "영화 <쥬라기 공원>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현대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해서 얻은 수익과 같다"라는 말은, 그 후로 30년 가까이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마다 사용되는 잠언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을 때에도, 해외에서 한국이 문화콘텐츠 강국으로 성장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저 발언에 주목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 당시를 회상하면 저 얘기가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부 각 부처에서 '한국형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자는 명목으로 예산이 편성되었으니까요. 문화체육부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부, 과학기술처, 영화진흥공사에서 각각 콘텐츠 진흥 지원금을 예산에 책정했고, 서울시나 부천시, 춘천시와 같은 자치단체에서도 개별적인 진흥책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애니메이션 회사나 영화사 기획실 직원들은 그런 지원금을 꼬박꼬박 타 먹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무분별하게 업데이트되는 정부 정책을 수시로 검색할 수 있고 기획서나 프레젠테이션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에 능숙한 젊은 사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예산들이 개별 콘텐츠 제작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건 좀 더 먼 얘기가 됩니다. 사실 "오늘부터 '죽여주는 이야기' 하나 만들자."라고 해서 그게 그렇게 금방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정부 관료 입장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아직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던 때이기도 했죠. 전시행정의 습관이 사라지기 전이었으니까요. 정부부처의 예산들은 주로 '컴퓨터 그래픽을 만들기 위한 장비 구입'과 같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향해 집행됩니다. 안타깝게도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매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른 하드웨어 필요 사양도 그만큼 순식간에 상승하였기 때문에, 정부 지원금으로 구입했던 컴퓨터 그래픽 장비들은 대부분 1~2년 후에 고철로 변하게 되었죠. 저 역시 <쥬라기 공원>을 만들었다는 SGI 인디고 R4000 컴퓨터 본체를 그냥 스캐너 올려두는 테이블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이후엔 콘텐츠 진흥 정책의 집행기관도 일원화하고 집행 부문도 좀 더 상식적인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한국영화의 폭발적인 발전의 원인을 모두 정부 지원으로 돌리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연재한 얘기를 다시 정리하자면, 먼저 그 발전을 받쳐줄 만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토대라고 볼 수 있겠죠. 재밌는 영화를 돈 들여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걸 소비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이 성숙되지 않았다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테니까요. 다행히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 감상을 통해 관객들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 정책과 이후에 가정용 홈 비디오 시장까지 열리면서 이런 시장의 토대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충무로 시스템에 새로운 제작 인력들이 점차적으로 유입되면서 완성품의 품질이 향상될 수 있었던 것도 정부의 콘텐츠 진흥책이 단순한 세금낭비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주요 공신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영화의 '소위' 때깔이 바뀌게 된 과정에는 제작인력 외에도 숨은 공신이 있었으니 바로 '기획실'의 등장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기획실이 있는 영화사는 있었죠. 그리고 극장들도 기획실을 두고 있었구요. 주로 영화 광고 및 포스터를 광고업자들과 같이 제작한다든지,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만들어 보낸다든지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주먹구구식이긴 했었지만, 80년대 초중반에 <화천공사> - <황기성 사단>에서 이장호 감독의 영화를 제작하고, 또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같이 이끈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하면서 영화사 기획실의 홍보 활동들도 점차 조직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한국영화 산업의 분기점이 되는 영화가 나오는데 '신철' 기획과 '김의석' 연출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신철 대표가 기획해서 영화사에 판 영화가 <결혼 이야기>가 처음은 아니었어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같은 작품은 흥행에 꽤 성공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결혼 이야기> 만큼 영화의 완성과 흥행이 완벽하게 기획/관리된 작품은 처음이었던 거죠. 후문으로는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새로 만든 익영영화사에 4,000만 원 받고 기획을 팔았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서울에서만 52만의 관객 (현재 기준으로 천만 관객에 필적합니다)이 관람을 했으니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제작비 6억 원 중에서 삼성에서 비디오 판권 선구매 방식으로 1억 5천 투자도 했고, 한국 영화 최초의 영화 속 PPL 광고까지 성공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실제 수익은 더 컸을 거라고 봅니다. 이 영화 이후로 모든 한국 영화의 기획서에서 PPL 광고 전략 항목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한국 영화에 끼친 영향은 <백투더퓨처>에서 나온 펩시나 나이키 신발보다 크다고 해야 하겠네요.


보통 상업 영화 기획에서는 시장분석, 소구 대상층 설정, 아이템 발굴, 이야기 개발, 시나리오 집필, 제작 예산 설정, 주연 배우 캐스팅, 투자 유치 및 마케팅 계획, 주요 스테프 구성, 세부 예산과 예상 흥행 수익까지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영화 한 편의 세련된 완성도와 흥행 수익까지 다 관리될 수 있도록 만드는 프로세스가 <결혼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당연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결혼 이야기>는 그 해 최고의 흥행 성공과 함께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의 성공이 한국영화 기획의 눈높이를 높여 놓았기 때문에, 이후에는 이 정도 구체적인 기획이 없으면 대기업에 비디오 판권을 사전 판매하는 건 꿈도 못 꾸게 되었습니다. 시나리오와 주연배우만 보고 투자를 하는 도박과도 같던 기존의 한국 영화 산업들이, 철저하게 계획된 돈벌이가 되는 현재의 제작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도 바로 <결혼 이야기>의 공훈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시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나, 종합유선방송 기획부서, 혹은 서울시내 극장 기획실에서 근무를 하던 (4장에서 언급했던) 수많은 0세대, 1세대 영화광들이, <신씨네>(신철, 오정완 <은행나무 침대>,<엽기적인 그녀>, <약속>), <명필름>(심재명, 이은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건축학 개론>), <영화세상>(안동규 <박봉곤 가출사건>, <북경반점>, <아파트>), <기획시대>(유인택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지독한 사랑>, <이재수의 난>), <씨네월드>(이준익 <달마야 놀자>, <황산벌>, <라디오 스타>), <씨네 2000>(이춘연 <여고괴담>, <미술관 옆 동물원>, <거북이 달린다>) 등에서 한국 영화 기획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충무로의 기획실 영화들은 "신인감독들을 소모품으로 쓴다"라든지 "매출 보장을 위해 유사한 장르만 답습한다"와 같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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