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이어즈 주립공원 - 알루엣 캠핑장
"암튼, 이제부터 난 캠핑장 가면 요리 안 할 테니 그리 알아."
"그래라. 누가 하라고 떠밀었나? 매번 자기가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요리를 맡아놓고는..."
"참 나.. 아 그럼 당신이 해 보등가..."
"아놔.. 누구는 요리를 안 해봤나? 그깟 요리 내가 하믄 되지..."
그러니까, 아마 재작년 추수감사절 캠핑 때였던 것 같다. 밴쿠버 지역의 10월 날씨답게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무척 쌀쌀했었는데, 무슨 일이었는지 (뭔 일은 뭔 일. 노상 그 모양 그 꼴인데) 캠핑 준비 과정에서 아내와 다투고 급기야 주방업무의 파업을 선언한 적이 있었다. 뭔가 또 준비과정이나 막상 가서도 혼자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벨이 꼴렸던 게지.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뭐 저런 식의 레퍼토리였을 것 같은데, 좌우간 그때 롤리 호수 캠핑 때는 트레일러 운전 및 세팅, 타프 설치, 장작 패기 및 모닥불 유지는 내가 맡기로 하고, 그 외 요리나 뒷정리는 아내가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집대로 약속대로, 지인분이 놀러 오셔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놀 때에도, 그냥 캠핑의자에 꼼짝 않고 앉은 채 만들어주는 요리만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아내가 달궈지지도 않은 프라이팬에 부침개 반죽을 던져 넣는 걸 보고 빠직한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 잔소리 안 하고 가만히 술 마시고 음식 받아먹으면서 즐겁게 보냈다. 이런 나의 참을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그날 저녁 커다란 선물을 하사하셨으니......
이름하여, 급성 좌골신경통
춥고 축축한 날씨에 밖에서 가만히 의자에 앉아 대여섯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더 이상 용납이 안 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뭐, 딱히 무리해서 뭔가를 들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엉덩이가 시큰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누웠다가 잘 일어날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눕는 것도 몇 가지 자세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독한 통증을 수반했기 때문에 나머지 캠핑일정 동안에는 그야말로 쥐며느리처럼 웅크린 채 꼼짝도 않고 보냈었다.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트레일러 연결과 운전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집에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 공간에 트레일러를 넣을 때, 당시에는 몸으로 밀어서 넣었어야 하는데 상체를 숙인 채 어떻게 밀어보려고 했다가, 정말 악소리를 내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못된 승질머리 때문에 고집을 피운 채 추운 날 밖에서 몸을 충분히 움직이지 않은 걸 후회하는 일 같은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기 급급했다. 아무리 바퀴가 달렸다고는 하지만 캠핑 트레일러의 무게는 1톤이 넘었는데, 게다가 주차공간까지는 약간 오르막 경사까지 있었다. 그걸 아내 혼자 낑낑대며 밀어 넣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 했었다.
늙어가면서, 몸의 노화 때문에 좋아하는 걸 못 먹게 되고,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그전에도 얼마든지 있어왔다. 워낙 익숙하다 보니까 그런 기미가 보이면 기계문명의 힘을 빌려서 해결을 하든지, 아예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쉽게 넘기기에는 캠핑 트레일러의 덩치가 너무 컸다. 몸의 노화 때문에 캠핑 트레일러를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된다면, 이건 그냥 모든 이에게 민폐만 끼치는 짐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걸 텐데.. 하면서 진지하게 트레일러를 팔 생각을 했었다. 마침 팬데믹이 진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전국적인 캠핑 열풍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있었고, 중고 RV들이 대량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막상 거래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번에도 기계 장치의 힘을 빌려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지난 컬터스 호수 캠핑에서는 또 손목을 다쳤다. 비가 많이 오는 광역 밴쿠버 지역의 주립공원 땅바닥은 워낙에도 미친 듯이 단단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이번 여름에는 이상기후로 인해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땅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걸 술 마신 김에 팔목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죽어라고 망치질을 해서 텐트 팩을 박았더니, 다음 날 아침 일어나려고 손을 짚었는데 비명이 터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손목 터널 증후군으로 생각하고 안 쓰면 낫겠지 싶었지만, 점점 더 아파지더니 며칠 후 손바닥 아래쪽으로 물혹이 두 개가 생긴 걸 발견했다. 어라? 손목을 살짝만 젖혀도 악소리가 나오고, 물혹도 점점 더 커지면서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상황으로 발전했다. 잼 뚜껑은커녕 가스 밸브 하나 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아놔... 이걸 가지고 밴쿠버에서 의사를 만나봐야 진통제 처방 해 주면서 며칠 더 지켜보자고 할게 뻔하니, 알아서 진통소염제 먹어 가며 자가 치료를 하고 있던 도중, 한국 웹사이트에서 이런 병을 발견했다. '손목결절종'.
일단 짐작 가는 병명을 찾고 나면 의사 만나기 훨씬 수월해진다. 내 증상을 족집개처럼 영어로 표현하도록 미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이 악화되었을 때의 증상을 미리 커닝해서 뻥 칠 준비를 해가면 느긋한 밴쿠버 의사들에게 경각심을 던져 주는 효과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응급으로 초음파 검사를 잡아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밴쿠버에서 응급은 지금 당장 죽을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2~3주 정도 기다리는 걸 말한다. 당장 이번 주말에 워크인 캠핑장으로 텐트 캠핑을 가야 하는데 말이지. 게다가 간만에 비도 온단다. 왜 아니겠어. 내가 캠핑을 가는 날은 당연히 비가 와 줘야지. 문제는 비 오는 날 워크인 캠핑장에서 캠핑을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번거롭고도 어려운, 그리고 뒷정리도 힘든 일이라는 점이다. 특히 텐트 설치가 더 그렇다. 비가 얼마나 올진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텐트 원단은 (공기순환을 위해) 완전 방수가 아니라 물을 그냥 흘러내리는 재질이라서, 플라이의 모든 부분을 쫙쫙 펴서 페그로 고정하지 않을 경우 빗물이 고여서 안쪽으로 스며들 수가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손목 상태로 플라이 설치에 필요한 12개 페그를 박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처음에는 이번에도 기계 문명의 힘을 빌어보려고 전동 망치를 알아봤으나 일단 망치의 힘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무척 구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땅이 단단해서 페그가 잘 안 들어가는 문제였기 때문에 전동망치로 박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손에 전달되는 반발 충격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페그가 아니라 밧줄을 사용해 고정을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밤에 화장실 가다가 밧줄에 걸려 넘어질 위험도 있는 데다가, 여전히, 비에 젖은 타프나 가제보를 이고 지고 걷다가 차에 실어 옮길 걸 생각하니 여러 가지로 갑갑해졌다. 그래서 결국, 캠핑장에 초대한 지인들에게 부득이하게 캠핑을 취소해야 하겠다고 전했다. 주립공원 캠핑 예약을 취소할 때는 예약 수수료는 물론 환불이 안 되고, 심지어 취소 수수료 $6.3 마저 내야 한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일단 캠핑장을 매점매석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함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야속하다. 눈물을 머금고 취소를 위해 주립공원 웹사이트를 열었는데, 응? 비가 온다고 캠핑을 취소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닌 것 같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예약이 가득 차 있던 주립공원 지도에 초록색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는 것은, 워크인이 아닌 차로 들어갈 수 있는 드라이브 인 사이트에도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뜻. 역시나 골든이어즈 주립공원의 알루엣 캠핑장에 자리가 하나 났다. 앗싸, 개이득! 손을 벌벌 떨면서 재빨리 예약을 변경할 수 있었다 (예약 변경 수수료도 $6.3 내야 했지만). 캠핑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는 것도 결코 손이 덜 가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에는 무척 의지가 되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릴 거라는 예보와는 달리, 금요일 저녁에 들어갈 때에는 날이 개어있었다. 그래도, 비가 내린 직후의 숲 공기는 언제나 상쾌하다. 골든이어즈 공원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더글라스 전나무들이 신선한 산소를 내뿜고 있었다. 작년, 더글라스 독나방 송충이 때문에 고생을 해서 오면서도 적잖이 걱정을 했는데도 공원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벌써 든다. 아내와 경쟁적으로 "내가 뭐라 그랬어. 일단 나오면 좋다니까"라고 내뱉는다. 올해는 이렇게 우연한 동기로 한동안 안 갔던 캠핑장에 자주 가게 되는데 알루엣 캠핑장도 지난 2016년 6월을 마지막으로 가보질 않았다. 그전에도 자주 찾던 곳은 아니었던지라 캠핑장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일단 서둘러 트레일러와 가제보 세팅을 마치고 캠핑장 투어를 나섰다.
먼저 알루엣 캠핑장은 다른 주립공원 캠핑장과는 달리 샤워시설이 없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고 해서 신기하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아... 맞아, 이랬었지.. 하며 기억이 난다. 조그마한 건물을 반으로 나눠 양쪽에 남녀 각각 2개의 화장실 부스가 있다. 알루엣 캠핑장의 샤워장엔 화장실 부스가 하나밖에 없고 (남자 소변기는 아예 없다), 샤워부스만 네 개씩 있어서 샤워하긴 무척 편하겠지만, 멋 모르고 수세식 화장실을 찾아 뛰어 온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하다. 심지어 샤워장 조명은 동작 감지 센서로 작동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센서가 건물 중앙에 있어서 밤에 샤워를 하는 도중 불이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작은 수세식 화장실 건물에는 아예 전등이 없으므로 밤에 샤워장이나 화장실에 가려면 반드시 플래시를 들고 가야 했다.
날씨가 습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추운 밤이었다. 벌써 여름 한가운데인데 이건 뭥미... 트레일러 안에서 가스 난방을 돌려도 한기가 가시질 않아 동계 침낭을 또 뒤집어쓰고 자야 했다. 자다 깨다 하면서 침대 위에 침낭과 같이 웅크리고 있다가 요의가 한계에 달할 때까지 참고 또 참다가 일어났다. 새벽 5시. 일어난 김에 롱테이크 촬영용 구형 휴대폰을 설치한다. 낮에 롱테이크 촬영을 하면 원하지 않은 배경음이나 대화 소리가 들어가 후반작업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촬영한답시고 생색을 내면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해달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 마침 아직 동이 트기 전 새소리가 시끄럽다. 잘 됐네. 이 때다 싶어서 카메라 설치를 하고 가볍게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다시 쪽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제 7시를 넘었다. 휴대폰을 철거하고 커피를 내리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 타이밍 쥑이네. 저 휴대폰은 방수기능이 전혀 없었는데.
이틀째엔 지인들이 찾아주셔서 또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다는 '연맥(연태 고량주와 맥주의 칵테일)'과 함께 철판요리와 감자탕을 먹고 나니 금세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알루엣 캠핑장 에는 조그만 숲 산책로들이 두 군데 있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거나 금방 그친 후의 산책로는 훨씬 더 강렬한 초록색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렇게 잘 알려진 산책로가 아니라서 그런지, 정기적인 관리나 정비가 안 되어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도랑을 건너는 나무다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고, 산책로 곳곳이 쓰러진 나무로 막혀 있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먹고 마시면서, 또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타인의 존엄성을 지켜주면서 동시에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 겸손하면서도 재미를 즐기면서 늙어가는 일은 무척 어렵다. 더불어 취미생활이나 여가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관리도 역시 어렵다. 어릴 적부터 취미생활을 시작하기에는 경제적 여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빨리 사회에 자리 잡고 싶어서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인생을 즐기려고 하기보다는, 선배들과 만나 조언을 듣고 사회 인맥을 쌓으려는 일에 집중했다. 결과는 매일 밤, 매 주말 술자리. 등산화 한 켤레 하나 살 여유도 없이...
비록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정리하고 늦게나마 재미있게 살아보려 노력해 왔다 하더라도, 막상 이렇게 몸이 삐걱대기 시작하면 아쉽다. 어쩌면 이 손목이 남은 평생 안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만일, 한국 인터넷 검색에서 본 손목결절종이 맞다면, 낫더라도 증세가 18개월 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어찌 되었든 주립공원에서의 텐트 캠핑은 이제 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우울해지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늙는다는 게 그런 건데. 허리 디스크가 터져서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를 못 치게 되는 친구들도 많고, 요산, 혈당, 콜레스테롤 때문에 맥주나 삼겹살, 밀가루 음식을 못 먹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쩌면, 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필드에 나가는 것이나, 밀가루 음식, 맥주, 삼겹살은 또 다른 한 주를 버티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겨울 내내 다음 해 여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나의 캠핑처럼.
방법은... 뭐 별거 있겠나? 하는 만큼 하다가, 안되면 또 다른 걸 찾으면 되는 거지. 지난 20년간 주변 지인들에게 캠핑 전문가 취급을 받아왔다고 하더라도 그런 평판이 딱히 엄청난 긍지를 줬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즐거웠고 재미있었으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단이 은퇴하면서 "난 사실, 어릴 적부터 꿈은 야구선수였어..."라고 했던 말을 항상 기억하려고 한다. 비록 그의 야구선수 경력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지만, 천문학적인 연봉에 보답해야 하는 NBA 스타 시절과 비교해 덜 즐거웠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지금부터 내 몸에 생기는 모든 질환과 질병들이 결국 죽을 때까지 함께 가게 될 것이라고 인정할 나이가 되었다. 다행히(?) 20대에 탈모가 시작되면서 질병을 내 인생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익숙해졌다. 또 그렇다고, 내 신체장애가 뭔가 새로운 여흥의 기회를 마련할 가능성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릴 적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50이 넘도록 수영을 배우질 못했다. 비강에 물이 들어갔을 때의 지독한 통증을 견디기도 힘들었지만, 그 통증이 물에 대한 공포를 순간적으로 증폭시켜서 코에 물이 들어가자 온몸에 힘이 들어가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영에 엄두도 못 내고 있던 와중에 코로나19 감염으로 후각의 일부분이 완전 상실되었다. 그리고 이런 후각 장애 덕분에 코에 물이 들어가도 그렇게 괴롭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었다. 여전히 물은 무섭지만, 그래도 이제 25M 레인 편도 헤엄 정도는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