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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11. 2023

It is in nobody's way

규칙과 재량에 대해서

아내 부서 직원 중 한 명이, 자기 친구 딸 학교 봉사활동에 필요한 공병수집을 도와준다면서 (캐나다에선 공병에 100원 정도 보증금이 있어서 어린 학생들이 봉사활동 자금 조달을 위해 수집하러 다니기도 하거든), 공병들을 학교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거야. 사실 우리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여긴 회사인데. 아무리 그 직원이 30년 넘게, 자기 청춘을 회사에 다 바친 직원이라 할지라도, 개인소품을, 그것도 공병을 회사창고에 보관하냐고. 그래서 아내가 직원들에게 개인물품을 회사 비품 보관하는 곳에 두지 말라고 공지를 했다지. 뭐, 모든 사람이 그 공지가 누굴 향하는지 알았겠지만 말야.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공지에 깜놀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어떤 직원은 조심스럽게 불평을 하기도 했다더라구. 그건 아무한테도 방해가 되지 않는데 (It is in nobody's way)라며...


어쩌면 나도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이런 예외를 두는 관습에 좀 더 너그러웠을지도 모르겠어. 비단 이민처럼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일이 아니더라도, 어느 회사에 취업을 하든지, 아니면 신임 소대장으로 새 부대에 배치를 받더라도, 어느 집단에서 원칙에서 벗어나 예외적인 관습을 두는 것에 대한 문화적 충격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기득권을 지닌 토착세력에 속해있을 때는 더 예외를 두는 것에 너그러워지겠지. 근데, 그 모든 걸 고려한다 하더라도, 캐나다는, 특히 밴쿠버는 이런 예외조항을 두는 관습이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월세 제한 조항이 있었어. 말하자면 전체 아파트 건물에서 한 번에 두 집 이상 세입자를 들이지 말자는 조항이었지. 세입자들이 자가 소유자들에 비해 공공시설을 좀 험하게 쓴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 거야. 실제 같은 아파트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내 경험상으로도 그렇고. 그렇다 보니까 이사를 나가면서 자기 집을 팔지 않고 세를 놓고 싶은 사람들에겐 곤란한 상황이 많았지. 근데, 내가 반상회 멤버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예외를 달라는 신청이 왔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상회 멤버들 모두 예외 적용에 동의하는 거야. 그 사람은 그동안 살면서 아무런 사고 안 치고 불평도 안 하고 좋은 이웃으로 살았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냐면서. 역시나 It is in nobody's way.


예전에 소매업에서 일했을 때는, 뭐... 말도 못 하지. 회사에서는 아주 분명한 환불기준이 있었거든. 15일 이내, 영수증 지참, 동일한 포장 상태, 망가지지 않은 외형 등등 말이야. 그런데도 어처구니없는 생떼를 쓰며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 영수증이 없을 때도 태반이고 몇몇은 아주 악질이었어. 처음에는 상냥하게 회사 환불 규정을 안내하더라도 거절당한 고객의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면 나중에 감정싸움으로 치솟게 되지. 그럼 결국 슈퍼바이저를 부르게 되는데, 많은 경우 너무 아무 일도 아닌 듯이 환불을 뜩 해주고 가는 거야. 회사의 환불 정책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던 바로 내 앞에서. 그럼 이제껏 나한테 모든 분노를 뿜어냈던 고객은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한테 그래. "너 초보냐? 회사 정책을 좀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 일하는 게 어때?" 그리고 슈퍼바이저도 별일도 아닌 것 때문에 자길 호출한 나를 매우 한심하게 쳐다보며 얘기하는 거야. 로봇이냐고 (you, robot?). 아니 이렇게 번번이, 엉?, 그것도 악성 진상 고객들에게만 예외를 적용하려면, 엉? 뭣 때문에 규칙을 만드는 건데? 처음에는 너무 이해가 안 가서 스트레스를 받았었지. 내가 뭐, 법질서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인간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하하, 그냥 상대방이 이기는 게 싫었던 거였지만. 왜 우리는 자라면서 그런 얘길 많이 들었잖아. 여기서 당신 하나 예외를 봐주면 다른 사람들 다 해달라고 할 텐데, 그땐 어쩌냐고. 그럼 사회질서가 다 무너지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댐에 생긴 조그만 구멍을 막지 않지 않으면 결국 댐 전체가 무너진다는 둥, 법과 규칙은 지키기 위해서 있는 거라는 둥 말이지. 때문에 아주 작은 예외라도 그걸 허용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뭔가 회사에 목소리 높여 그러지 말자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단지 빨리 고객 서비스업을 벗어나야 한다고만 생각했었지. 알고 보니 다른 곳도 매한가지였지만.


물론, 어떤 방식이 더 우등하고 어떤 방식이 더 열등하다는 얘길 하려는 건 아냐. 한 사회 구성원이 다 인정하는 어떤 도그마가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인정하고 존중받아야지. 특히 나 같은 신규 이민자들은 모르는 그 사회의 문화나 역사적 배경이 있을 테니까. 그냥 뭐, 이 사회에 좀 더 적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과 더 부드러운 소통을 하기 위해서,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궁금한 거지. 그래서 생각해 봤어. 법과 규칙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말이야. 일단 소매업에서 일하는 동안,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동료들이 '예외를 한 번 두기 시작하면 끝도 없고 한도 없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어. 반면에 이란, 중국,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은 저런 공포심에 공감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어떤 태도가 더 바람직한 것인가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집단주의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경우 질서 유지에 더 강한 의지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는 거지.


법과 규칙을 개인의 자유로운 재량보다 상위에 두는 경향은, 집단주의 문화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특히 너나 나처럼 흙수저로 자란 사람들은 사실 법, 규칙에 더 강하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잖아. 그게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지. 기득권자들이 더욱더 부를 축적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은 온갖 탈법을 하기 때문이고, 제대로 된 법 집행이 있다면, 그래서 저들을 깡그리 잡아 처넣을 수 있다면, 사회는 훨씬 건강해질 거라는 기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어. 여전히 우리는 태평성대라고 하면 현명하고 법을 수호하는 솔로몬 왕이 통치하는 사회라고 생각해서 일지도 몰라. 한편으로는, 우리처럼 없이 자란 사람들은 자신이 재량껏 뭔가를 결정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을 거야. 항상 규칙을 지킬 줄만 알았지, 내 책임 하에, 내 재량껏, 예외를 주는 일을 못 해봤다는 거지. 만일 문제가 생기게 될 경우 정말 끝장날 수도 있거든. 나를 지켜줄 재산이나 권세가 없으니까 말야.


반면, 개인의 재량을 규칙보다 상위에 두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봐. 법이나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는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도, 그걸 어기는 사람을 처벌하거나 보복하기 위해서도 아니야. 그보다 집단의 안녕과 조화가 더 큰 명제가 되는 거지. 다시 말해서 규칙을 어기는 것이 집단의 안녕과 조화를 깨뜨리지 않거나, 혹은 뚜렷하게 그 징조를 보이지 않는 한, 예비행위만 가지고 적발하고 처벌하는 경우를 목격한 일은 무척 드물었어. 반대로, 어떤 행동이 집단의 안녕과 조화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이 될 때 그걸 제제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기 위해 법과 규칙이 존재하는 거지. 이는 다른 상황에 비해서 안전에 관한 규정만큼은 무척 엄격하게 적용하는 걸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해. 그리고 예외 적용에는 담당자, 혹은 결정권자의 재량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예외를 가지고 딴지 걸거나 하는 경우도 드물더라구. 저 사람은 어떤 사정이 있겠거니...라고 생각한다든지,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는 나, 이렇게 생각한다든지 하는 거야. 어떻게 보면 공정하고 강력한 규칙 집행을 기대하는 한국 사람도, 상황에 맞는 담당자의 재량에 의존하길 좋아하는 캐나다 사람도 모두 다 중세시대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어. 한비자가 법으로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는 걸 설파하고 다녔을 때가 기원전 250년 정도부터인데, 수십 세기를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걸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 이렇게 부담 없이 규칙에 예외를 많이 두는 관습은, 그 사회에 새롭게 진입하는 신인들에게 무척 장애가 되는 것도 사실이야. 이게 캐나다 이민 정책의 굴절된 단면이라고 생각해. 영어 표현 중에 Book Smart (책을 통해 지식을 얻은)와 Street Smart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은)가 있는데, 같이 일하는 현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은근하게 Book Smart를 깔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겠지. 실제 현장에서 적용되는 관습이 책에 적혀있는 규칙과 다른 점이 많으니까.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하지 말라는 것만 안 하면 잘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충격을 많이 받게 되는 거지. 북미의 팁문화는 가장 대표적인 문화충격이라고 생각해. 내가 임의로 재량껏 서비스 요금을 책정할 수 있다니 말이야. 이게 처음에는 이걸 왜 줘야 하는가부터 시작해서 얼마를 줘야 하는지 너무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었어. 그런 와중에 가장 뻔뻔한 건 이민을 받고 있는 캐나다 정부가 되겠지.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면서도 같이 융화하며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다니니까. 기득권자들 입장에서는 강제적인 법 집행 없이도 다양한 문화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겠지. 실상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맨땅에 헤딩해 가면서 기존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인데도 말이지. 차라리 허위로 ’다문화의 모자이크‘를 주장하는 캐나다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다문화의 용광로‘를 주장하는 미국이 솔직해 보일 정도야. 아니라고? 그럼 팁을 폐지하자고 청원하면 할 건가?


지금은 어떻냐고? 좀 많이 적응되었다고나 할까? 일단 내 재량껏 판단하는 행동이 사회질서를 좌지우지할 거라는 공포심이 사라진 건 사실이야. 오히려, 누군가의 재량에 의해 어떤 예외적인 서비스를 받게 되면 무척 감동하기도 하지.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선 적절한 예외를 두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다는 것도 인정해. 결국 법과 규칙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하지만 여전히, 관습에 의존하는 것보다 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나와 같은 이민자들의 정착에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예외가 그만큼 많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법과 규칙이라는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한다는 얘기가 될 텐데, 이쯤 되면 법과 규칙을 좀 개정을 할 필요를 느낄 법도 한 데 말이지.


 




우리 아파트 규칙 중에는 또, 지하 주차장에 RV를 주차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거든. 아마도 거기에 거주하며 생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거나, 혹은 프로판 가스 누출 때문인 것 같은데 (그냥 그 정도 이유 때문일 거라고 믿고 싶은데), 우리는 그걸 RV를 사고 나서 알았지 뭐냐. 근데 한동안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더라고. 아마도 그땐 내가 반상회 멤버여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정말 멘붕이 왔었어. 아이고... 저걸 또... 어디다 세워두나. 근처에 RV 주차장도 없는데... RV 주차장에 월 사용료를 내는 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캠핑을 한번 가려면 모든 짐을 싣고 주차장으로 일단 간 다음에 또 RV에 옮겨 싣고... 그것만 벌써 두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하며 말이야. 그러고 나선 이제 합리화에 들어가는 거야. 우리 RV는 반으로 접히는 거라서 아무도 그 안에서 거주할 수 없다, 혹은 프로판 가스탱크는 평소엔 항상 베란다에 보관한다는 식으로 말이지. 그래도 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어디서 커다란 차를 덮어씌우는 덮개를 구해 덮어놓고 있어. 사람들 눈에 잘 안 띄게. 그러다가 어느 날 다른 반상회 멤버에게 고백을 했지. 그런 규칙이 있는 줄 몰랐었다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누가 뭐라 그러면 Grandfathered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새로 생긴 규정으로부터 예외를 부여받는 일)됐다 그래." 하며 쿨하게 넘어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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