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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Nov 26. 2021

인간을 닮은 돼지,돼지를 닮은  인간(1)

돼지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봐..

유년기의 겨울방학이면 누나와 함께 할머니 댁이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 지내곤 했다.

그 시절 할머니 댁의 난방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던 원시적인 형태였다.

할머니는 방바닥이 여전히 뜨겁게 달궈져 있더라도  항상 잘 때가 되면 장작을 더 넣으러 가셨었다.

종이로 막은 미닫이문을 스르륵 열고

하아---하얀 입김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할머니를 따라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 집의 뒤편에 있는 아궁이로 가면 어설피 닫힌 아궁이 뚜껑 사이로 얼핏 설핏 빨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뚜껑을 열면 이글거리는 불꽃과 따뜻한 바람이 훅  하고 다가왔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을 천천히 움직여 가마솥 옆에 놓인 장작 몇 개를 아궁이 속에 쑤셔 넣었고 어린 장작에 부딪힌 늙은 장작으로부터 빨간 불꽃이 흘러나와 어둠 속으로 명멸해 갔다.


종종걸음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면 할머니는 형광등을 끄고, 이어 따뜻한 온도의 백열전등을 켰다.

할머니는 자신의 관절처럼 빠듯하게 움직이는 부엌문을 열고 구부정한 허리를 펴서 찬장에서 뽀얀 밀크 글라스로 만든 컵 두 개를 꺼내 방 모퉁이  협탁으로 가서는 살짝만 건드려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는 작 옥빛을 띈 자기 병을 열어 그 안에서 하얀 탈지분유 몇 숟갈과 하얗고 반짝이는 설탕을 컵으로 담뿍 옮겨 넣고 다시 뜨거운 물을 졸졸 부어 댕그랑 티스푼을 꽂아 주셨다.

합죽하고 주름진 입으로 분유의 온도를 체크하시고 우리에게 건내 주시면,우리는 어둑한 전구불빛 아래에서 티스푼으로 홀짝대며 그 하얀 지방을 떠 마셨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하고 향긋한 그 느낌은

마치 액체로 된 솜뭉치 같았다.

우린 그 탈지분유를 참 좋아했다.

물을 끓일 줄 모르던 우리는 종종  할머니 몰래 분유 캔에 입을 대고 분유를 털어 넣기 일쑤였고 운 나쁘게도 가루가 기도 쪽으로 흩날려 들어갈 때면 세찬 재채기와 함께 튀어나온 분유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속으로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곤 했다.

우리는 매일 밤 탈지분유를 마셨고  매일 낮 가루를 퍼 먹었다.

이를 알았던건지..어쩌면 내 삶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를 할머니는 겨울이면 장롱에 탈지분유 캔을 넉넉히 쟁여 놓고 우리를 맞이하셨다.

포근한 분유를 음미하다가 아주 두꺼운 이불 위에 누워, 더 무겁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면 문풍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실낱처럼 들어오는 게 느껴졌었다.


"남녀 호랑교.. 남녀 호랑교.."

어딘가 두렵게 들리는 탁하고 거친 할머니의 주문 소리가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박명의 시간.

뒤척이며 잠에서 깨면 뜨거운 구들장과 무겁고 두터운 이불 덕에 땀에 젖은 몸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고.. 문풍지 사이 들어오는 찬바람은 땀을 식히며 서늘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다시 뜨거운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고 있다가 할머니의 주문 소리가 잦아들 때쯤이면 거부할 수 없는 잠 속으로 다시금 빠져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객담을 뱉어내는 소리와 함께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 그 연기가 이불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런 겨울방학 어느 날..

할머니 집 옆을 흐르던 도랑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어느 집 돌담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영차 영차.."남자 어른들의 힘찬 구호 소리도 들려왔다. 열린 문틈 속으로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고 바라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정방형의 마당을 둘러싸고 저마다 웃거나 떠들고 있었고 그들보다 앞쪽에선 여러 명의 장정이 흰 밧줄을 사방에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기둥과 장정들의 손에서 이어진, 사방에서 뻗어나간 밧줄의 중심에는 거대한 돼지가 한 마리 묶여 있었다.

돼지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소리를 쉬지 않고 질러댔다.

사람을 꼭 닮은 그 큰 눈은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때 한 사람이 무언가 길고 검고 섬칫해 보이는 것을 어깨너머로 치켜들고 돼지에게 다가갔다.

나는 그 이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것이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이고

섬칫해 보이는 것이 곧 끔찍한 일을 벌어지게 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생명들 중 어쩌면 돼지와 나만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빼고 한달음에 도랑 옆 내리막길을 달려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 아직도 따뜻한 아랫목의 두터운 이불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얼마 뒤 두려운 맘이 가시자 나는 이불속에서 나와 분유 가루를 한 수저 담뿍 퍼서 입에 넣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분유의 포근함을 음미하며 안온한 낮잠에 들었다.

그날은 내가 삶 속에서 돼지를 본 첫날이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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