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토리아빠 Nov 26. 2021

인간을 닮은 돼지,돼지를 닮은  인간 (2)

돼지야 네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1편에 이어...]

그해 겨울방학  도살되는 돼지를 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늘 PORK를 보았을 뿐.

달리 PIG를 목격하지는 못했다.

어디 나뿐이랴..

서너 세대 동안 인간은 돼지와 단절된 삶을 살아왔다.

마이클 폴란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돼지고기를 pig가 아니라 pork라 칭 하는 것은

우리 속 돼지와 식탁 위 돼지를 이원화시키기 위해서고 한다.

(cow와 beef도 마찬가지다.)

사실이야 어떠하든 식탁 위의 돼지고기에서 우리 속에서 살아있는 돼지를 연상시킬 사람은 잘 없다.

만화와 동화도 마찬가지라서 돼지를 항상 의인화시킨다.

디즈니가 처음 의인화 한 동물 만화를 만들었을 때 람들이 모두 비웃었다는 일화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런 경향은 디즈니 이후에 생겨났다.

덕분에 현대인은 돼지를 떠 올렸을 때 실제의 모습과 전통적인 이미지보다는 페파 피그나 피글렛의 귀여운 모습을 떠 올리기 쉽다.

디즈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돼지의 이미지를 이원화시키게 되었다.

자신이 수용하고 싶은 돼지와 수용하기 싫은 돼지의 이미지를 분리시킨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돼지를 보지 않고도 돼지를 소비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과 서너 세대 이전의 세대에게 돼지는 개보다도 더 가까운 동물이었다.

개는 소수의 상류층이 주로 키웠던 반면

돼지는 서민들이 키우던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역사에서 국가 구성원의 대부분이 하류층이었던 인류에게 돼지는 그야말로 인간의 친구이자 생명줄, 나아가 삶 그 자체였다.


한자의 '집' 家를 파자하면  지붕(宀) 밑에 돼지(豕)가 있다.

중국의 가옥구조가 계단에 화장실을 만들고 그곳 바로 아래에 돼지우리를 지었기 때문이다.

돼지는 정착한 인간의 삶의 근간이 되는 가축이자 정착된 삶의 터전을 상징하는 가축이었다.

서양 역 돼지와의 관계는 밀접하기 그지 없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돼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대통령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된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고래로부터 돼지는 정착한 농경민족의 가축이었다.

때문에 비교적 뒤늦게 농경을 시작한 서양에서 돼지는 소, 양, 염소에 비해 후대에서야 가축이 되었다.

돼지는 어떤 것이든 먹어치워 자신의 생존의 기반이 되는 지방과 단백질로 환원시키는 가공할 연금술사였지만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코로 땅을 파헤치는 루팅이라는 행위를 쉬지 않고 다.

그래서 목초의 유무가 삶의 기반이 되는 유목민족에게 절대신이 내려준 목초지를 가 없이 훼손시키는  돼지는 비효율적이고 유해한 동물에 불과했다.

이동하며 키우기도 쉽지 않고 신의 은총인 목초지를 의미 없이 훼손시키는  돼지보다는 양과 말을 먹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성경에선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묘사하고 예수도 돼지고기를 금지시킨 까닭도 그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돼지는 찌꺼기를 먹여 키울 때에나 비로소 가치를 지니는 동물이었던 것이다.

흔히 개는 인간의 친구라 비유하는데..

이 말을 고찰해 보면 참 재미있다.

인간은 개보다 돼지와 더 가깝게 지내왔고 돼지가 개보다도 지능이 높다.

그런데 개에게는 친근함을 보이고 돼지는 혐오한다.

이건 참 기묘한 일이다.

삶의 방식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고 돼지고기를 금했던  유목민뿐 아니라 돼지와 밀접한 삶을 살던 농경민족도 돼지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다.

심지어 돼지와 거리가 먼 세대인 우리에게 도는 가상의 돼지들이 아닌 진짜 돼지의 이미지는

'욕심스럽고 냄새나고 더럽고 게으르고 추한 '과 같은 부정적인 것뿐이다.

왜일까..?


추측컨대 개는 살아있을 때.

그리고 기능적으로 활동할 때에 이용의 가치가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상류층의 가축이란 높은 신분도 지니고 있다.

친구로 삼을만한 존재인 것이다.

하나 돼지는 그렇지 않다.

무엇이 개보다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고

인간보다 훨씬 많은 혓바닥 미뢰를 가지고 있으며 네발 달린 동물들 중 코끼리 다음으로 영리한 동물이자 인간과 유전자가 가장 비슷한 돼지에게 그런 이미지를 뒤집어 씌운 것일까?

범인은 바로 인간이다.


돼지는 생존을 위해서 무엇이든 먹는다.

물론 그 '무엇'들은 모두 인간이 준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사실 돼지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본래 인간의 몫이다.


모든 문명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모든 찌꺼기를 돼지에게 전가해 왔고 덕분에 역사 이후 돼지는 지구에서 가장 형편없는 먹이를 먹어 왔다.

1800년대 후반에 발간된 '미국 이민자의 가정생활'에서는 뉴욕 거리 곳곳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와 여기저기서 그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치우는 돼지들이 묘사는데..

양에서는  길거리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려두고 돼지를 풀어 청소를 시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신이 가진 가장 추악한 것들을 모두 돼지에게 전가했다.

돼지는 인간이 먹고 버린 찌꺼기 속에서 살며 인간이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그 음식물 쓰레기를 다시 고기로 환원시켜 인간에게 먹히는 것을 반복해 왔다.

신에게 전가된 소비의 잔해를 집어삼켜 다시 소비의 대상이 되는 사이클을 반복하는 효율성이 극대화된 이 가축은 마땅혐오의 대상이  수 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미각과 후각이 발달한 돼지가 그런 쓰레기로 연명하게 된 것은 흡사 영화 '얼라이브'의 생존자들이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던 상황과 같다고 한다.

인간보다 더 발달한 미각과 개보다 뛰어난 후각으로 그 악취와 끔찍한 맛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테니 그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 일인가..

어린 시절 할머니의 시골집으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뒤 군 시절 비무장지대에서 돼지를 두 번째로 목격했다.

세월을 격하고  내가 목도한 두 번째 돼지는 인간이 맨손으로는 맞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가축이 아닌 돼지는 맨손의 인간이 맞설 수 없는 사나운 야수이기 때문이다.

먼 옛날. 뛰어난 후각으로 먹이를 찾아 초기 농경 인류의 정착지 주변에 어슬렁 거리던 야수중 일부는 인간이 주는 안정적인 먹이에 길들여져 야성을 잃고 가축이 되고 말았다.

닭과는 달리 모든 돼지가 가축이 되지 않은 까닭은 닭과는 달리 돼지에겐  야생에서 살아남을 힘과 강인한 생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변에 머물던 돼지는 혐오와 소비의 대상이 되었고

산을 떠도는 돼지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각각의 모습도 변했다.

길들여짐이란 그처럼 무섭다.

존재의 형태와 습성을 완전히 바꾸고

마침내 종의 운명마저 바꿔 놓고야 만다.

오늘 길을 가다가 자기 덩치만 한 주인에게 매 맞던 거대한 골든 레트리버를 보았다.

잠시 후 도착한 아내의 학교 뒤편에 있는 수산 공장 입구의 좁은 철창 안에는 각각 미남, 미녀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가진 초췌한 털을 뒤집어쓴 시베리안 허스키 두 마리가 짖어대고  었다.

아내를 기다리는 잠시 동안 육중한 몸으로 반평도 안 되는 철창을 오가는 개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 시베리안 허스키들이 돼지 같아 보였다.

누군지도 모를 외노자의 손에 며칠에 한 번쯤은 좁은 마당이나마 산책을 할수 있을까?

주인도 아닌 자의 손에 의해 철창을 잠시 벗어났다가 다시 철창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꼬리를 백번이라도 흔들고 그 사람의 냄새만 맡아도 반가워할 테.

한때는 야수였을 저 개는 어쩌다 주어진 철창에 적응을 해 버린 것일까..

어째서 매번 다시 저 철창으로 돌아가는 굴욕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일까?

아니.. 인간인들 크게 다를까..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나는 좁은 정방형의 삶 한가운데 서 있다.

마치 내가 도살될 순간을 기다리는 돼지인 듯 느껴지기도 하고..

그만 덜컥 겁이나 할머니의 이불속으로 들어가 거부할 수 없는 단잠 속으로 빠져 들고 싶기도 하다.

일상에 길들여지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그 목소리의 성화에 못 이겨 이불 밖으로 나서 허름한 미닫이 문을 열고 나선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아궁이로 다가가 장작을 넣는다.

지게를 짊어지고 눈보라를 헤치고 나무를 찾아 눈 덮인 산을 향해 떠난다.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사람과 돼지는 92%의 염색체를 공유하며 해부학적으로도 외모, 심장, 피부, 혈관계, 소화계, 치아 등등 많은 부분에서 흡사하다.

주요 종교에서 돼지를 금한 까닭에  30%의 인류에게 돼지가 금기로 남은 까닭은 이처럼 돼지가 인간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돼지는 사람과 닮았고,

사람도 돼지와 닮기 쉽다.

편안한 일상에 안주하여 나약해진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매순간 나는 돼지를 생각한다.

나는 차라리 굶주린 배를 안고 거칠고 시린 들판을 헤매고, 두려움을 이겨내어,

마침내 인간들의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가 커다란 코를 들이 밀어 땅을 파헤치고 쑤성거리며 고구마와 감자를 캐 먹고 싶다.

잘 정돈된 그들의 밭고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다.

그렇다.

나는. 차라리. 농작물을 게걸스레 먹다가 총에 맞아 죽는 야생지의 삶을 선택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을 닮은 돼지,돼지를 닮은 인간(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