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anitas Jul 06. 2019

다음에 꼭 보자


잘 지내니? 나는 그럭저럭 지내. 이번 여름은 견딜만한 것 같아. 햇볕은 뜨거운데 바람은 시원해서 그런가 봐. 습하지 않아서 좋아. 이건 날씨 이야기고.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하자면 편지가 너무 길어질까 엄두가 나질 않네. 아. 약은 다시 먹기 시작했어. 좀처럼 견디기 힘든 일상을 지내고 있거든. 내 안에 무기력감과 우울함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전보다 더 힘들어져서. 그것의 연유들을 나도 알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아님, 스스로 쉽게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고 정의한 채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요 며칠 새 책 읽기가 힘들어. 활자에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겠거든. 재밌는 책을 찾아 나서고 싶은데 도서관에 갈 기운이 안 나네. 그래서 책을 읽는 대신 글을 써. 이렇게 너에게 편지도 쓰고, 낙서도 하고, 다시 드로잉도 시작했어.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기도 하고, 꽁꽁 묶여있던 나를 홀가분하게 풀어주는 느낌도 들어. 이렇게 나름대로 나를 위한 시간도 가지고, 나의 순간의 감정들에 충실하려고 노력 중이야. 우울하면 있는 힘껏 우울해하고, 기쁘면 배가 터지도록 웃어보기도 하고, 무기력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어. 


안부를 묻고 쓸데없이 내 이야기만 하네. 전화를 할까 하다가 편지를 써. 전화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뭔가 쑥스럽거든. 문자는 길게 대화가 오가는 시간들이 너무 힘겹게 느껴지고. 메일을 보내고 싶은데, 메일은 주소를 모르고. 여차 저차 해서 이렇게 됐다. 너와의 시간들이 너무 그리워. 불광동 있지? 거기 그 작업실. 아직도 있더라. 진짜 오래된 건물이었잖아. 외벽의 페인트도 다 벗겨지고, 산 아래 있어서 가끔 멧돼지도 나와서 밤늦게 집에 갈 때 우리 진짜 안절부절못하면서 갔었지. 기억나? 나는 가끔 그때의 기억을 혼자 하며 실실 웃어. 너무 재밌었거든. 근데, 그때도 알았어. 지금의 순간들이 다시 오지 못할 아주 좋은 기억이라는 걸. 근데도 마냥 아쉬워. 그때 다 알았으면서도 왜 더 넘치게 좋아하는 감정들을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그런 거. 


연도별로 정리한 작업들을 보는데, 그때의 그림들이 참 좋았던 것 같아. 지금의 그림들은 너무 혼란스러운 것 같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는 싶은데 그게 귀찮아서 대충 마무리한 것 같은 느낌의 그림들이랄까. 그런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야. 그래서 그 작업실에서 진행했던 시리즈 작업들을 다시 진행해보고 있어. 요즘은 그 덕분에 아주 즐겁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어. 집중이 꽤 잘돼거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건 아주 좋은 일인 것 같아.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기가 나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라.


두서없이 내 이야기만 했네. 네 이야기도 듣고 싶다. 요즘 건강한지, 또 행복한지, 별 일은 없는지. 오늘 아침에는 뭘 먹었고, 저녁에는 뭘 먹을 예정인지. 시시콜콜한 이야기 모두 좋으니까. 다음에 꼭 만나자. 시간 한 번 내줘. 편지는 잘 가겠지? 회신은 다음의 만남의 이야기로 대신했으면 좋겠다. 언제나 고마워. 나에게 이따금씩 이런 말도 안 되는 편지를 전할 친구가 있다는 건 아주 운이 좋은 일인 것 같아. 


진짜 다음에 꼭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달의 소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