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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itas Apr 01. 2020

희미해져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남자의 투박하고 묵직한 손으로 뺨을 맞고 그이의 머리로 내 코를 가격 당하고 나서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코 아래에서 빨갛고 뜨거운 무언가가 바닥으로 뚝 뚝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난 알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맞으면 아프다는 느낌이 첫 번째의 것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순간의 공황상태였다. 주변의 소음들이 왕왕 희미해졌다. 남자는 앞에서 아직도 제 화를 다 풀지 못해 씩씩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일렁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저게 도저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저건 꼭 짐승 같았다. 이 마저도 짐승에게 미안한 비유다. 딱 맞는 비유를 아무래도 찾지 못하겠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일순간 정적이 휘감아 돌았다. 그게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 순간의 쉼표가 끝나고 나서야 미친 사람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나는 저 이가 나에게 한 것대로 저 사람의 아무 곳이나 분질러 놓고 싶었다. 나는 똑같이, 아니 그 보다 더 앙갚음해 줄 방법의 경우의 수를 빠른 찰나에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저 이에게 뺨을 갈겨주고 머리로 그이의 코를 내리쳐서도 과연 나는 무사할 수 있을까? 답은 되려 '내가 죽는다'였다. 나는 죽기 싫어서 그를 때리지 못했고, 그를 머리로 박지도 못했고, 그냥 도망쳤다. 


희미해지긴 했지만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누군가에게는 술에 취해 한 순간의 실수였고, 

자고 나서 하나도 기억 안 난다고 하면 그만일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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