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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itas Apr 02. 2018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Copyright 2018. chanmilim.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나의 이 물음에 아마도 당신은 별 생각도 없이 잘 지낸다고 선뜻 대답하실 거예요. 음. 그러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상의 당신이 잘 지내고 있는지. 느긋한 시간들을 누리고 있는지 궁금해요.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시작이 기대되나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무런 상념도 없이 잠에 잘 드시나요? 전처럼 새벽에 깨는 일 없이 푹 주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근래에는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가끔 만나면 좋은 책 몇 권을 소개해주던 당신과의 시간이 종종 그립습니다. 당신이 추천해준 책은 대부분 좋았어요. 그 책을 통해 당신을 알 수 있어 남몰래 설레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런 말은 처음 전하는 것 같아요. 저는 당신을 떠올리면 책이 생각나고, 책을 보면 당신이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꽤 괜찮은 헌책방을 발견했어요.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틈이 생겨 무심코 들른 곳이었는데.  참 좋았습니다. 퀴퀴한 낡은 종이 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들떴습니다. 사고 싶은 책은 많았는데 두 손이 무거울까 걱정되어 서너 권 정도로 추려 샀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쓰려고, 공간이라는 건축 잡지를 샀습니다. 전에도 제가 말한 적 있나요? 이 잡지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요. 7,80년대의 광고 이미지나 활자들을 보고 있으면, 좋은 이미지들은 이미 예전에 다 나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콜라주를 즐겨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이미 좋은 것들이 다 나왔으니 저는 그걸 오려서 조합하고, 그 위에다 몇 개의 선만 추가하면 이 보다 더 좋은 작업이 어디 있을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지만, 과거의 것들을 재 편집하는 것도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말이 샛길로 빠졌습니다. 하지만 전 이게 좋습니다. 당신과 만나 이야기할 때도 그랬잖아요. 항상 우리의 대화의 주제는 두서가 없었습니다. 이것저것. 즉흥적으로 그때 그때의 생각들을 공유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아마 남이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의아했겠죠. 쟤네들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하고요. 그저 우리는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그 감정들을 모조리 다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것이라는 걸, 우리는 서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요즘의 당신을 물었으니, 요즘의 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말해도 될까요. 저는 요즘 꽤 무거운 시간들을 견디며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의 반나절 이상은 전혀 즐겁지 않은, 성취감 따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곳에서 나름 열심히 보내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생활의 변화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니, 일단은 인내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이 인내란 가치 있는 것일까요?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되묻습니다. 제가 지독한 비관주의자란 거 알고 계시죠? 대답은 언제나 '아니오'입니다. 매일 저는 상상합니다. 내일 죽으면, 오늘을 엄청나게 후회할 것 같다고요. 그런 생각에 맞닿으면 한숨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환절기라 그럴까요. 계절이 변하는 시기라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출근길에 핀 벚꽃과 목련꽃을 보는데, 괜히 울컥했습니다. 세상은 때를 맞아 꽃을 피우는데, 저는 여전히 구석진 곳 한 켠에서 웅크리고 앉아 형체도 모를 이의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까요.


왜 이 편지를 썼냐면요. 그냥 넋두리를 하고 싶었어요. 그냥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나이가 드니 만나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 불필요한 자신의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말을 하는 시간을 다 합하면 한두 시간이나 될까요? 삼십 분은 채울는지. 


회신을 주시면 무척이나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겠지만, 그것을 바라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그저 가끔 이렇게, 아무 이야기나 하고 싶을 때 편지를 써도 될까요? 저는 일방적으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당신은 그저 읽어주시기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영 별로였다면, 당신의 내일 하루쯤은 보통이기를 바라며. 

당신의 자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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