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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itas May 07. 2018

그냥 살아있다

Copyright 2018. chanmilim.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틀 내내 집안에만 있었다. 아니, 차라리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의미 없이 핸드폰을 눌러댔다. 결제하지 않을 쇼핑을 했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들을 메모장에 적었고, 행동하지 않을 것들을 고민했다. 40부작짜리 로맨스 드라마를 하루 내리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기 하여 보았다. 가상 인물들의 사랑 얘기에, 그 뻔하고도 흔한 이야기에, 빠져 하루를 그냥 보냈다. 앞으로 있을 대사를 예측하며 중얼거렸고, 그중 열에 여덟은 맞았다. 예상하지 못할 대사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리지 않았다. 다 태우지도 않을 담배를 물었다. 가슴 아래의 통증에 어딘가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아마 올해 안에 병원은 가지 않을 것이다. 집에 있는 주전부리를 다 집어삼켰다. 부은 몸에 자괴감이 들었으나, 그 순간에도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있는 중이었다. 늦은 새벽엔 커피가 먹고 싶었지만, 다 떨어진 상태여서 먹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카페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몸이 무겁고 만사가 귀찮은 탓에 아침 일찍 가지 못했다. 꾸역꾸역 연휴의 마지막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카페를 찾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를 시키고 도서관에서 빌린 켄 윌버의 '무경계'라는 책을 다 보았다. 좋은 책이다. 그리고 친구에게 약속한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의미 없는 이 글을 썼다. 그럼에도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존재일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일 나는 회사에 가야 한다.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싫지만, 생각의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 재량에 없다. 나는 철저하게 외부의 잡음 속에서 나를 고요히 고립시키고 싶다. 그것을 욕망하지만 그러고 나면 같이 살아갈 수 없음을 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과 같이 살 수 없다. 돈을 벌지만 돈이 없다. 노동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냥 살아있는, 깨어 있는 시간을 때워 내기 위해, 잠에 들기 위해, 하루의 무가치함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가치 있는 일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만큼 쓸데없는 것이 없다. 이 나이를 먹도록 안 것은 그거 하나다. 


'그냥'이라는 단어가 좋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해준다. 특별함이 없는 단어라 좋다. 나란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해주니까. 나는 그냥 살아있다. 나는 그냥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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