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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니쉬 Oct 17. 2021

옛 동료를 보내며

(지난 2021년 6월 7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오늘로 입사한 지 꼭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나의 의지 반, 팀장님 의지 반으로 여러 이슈들을 쳐냈다. 어쩌다보니 입사 2주차부턴가 어느 TF팀에 속하게 되어 주간 정기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고, 또 20여명의 기획자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게 다 4주 안에 일어난 일이라니. 이를 위해 거의 매일 적게는 1-2시간, 많게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였다.


내가 이렇게 야근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크게 다짐했던 것은 가정을 가장 우선시하며, 일터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되 퇴근 시간을 꼭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팀장님도 가정을 우선시하라며 강조해주셨고 자신이 할당하는 이슈는 스스로 일정을 추정해 자유롭게 진행하라고 말해주셨는데도 말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부담감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내가 느끼는 워킹맘을 바라보는 시선은 월급루팡, 아니면 가정을 내려놓은 워커홀릭, 이렇게 두 극단인데, 나는 이 두 극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 아이가 생긴 남자 동료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싱글일 때에 비해 책임감이 높아졌다'라는 긍정적인 평가인 것과 비교해, 똑같이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듯 너무나 부정적이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편견에 대항하여 아이를 낳고서 이전보다 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동료가 되어 사회적 편견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정한 성실함의 기준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성실해 보이는지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가정을 챙기려고 퇴근 시각인 오후 7시에 거실로 나와 아이를 보다가 아이를 재우고서 다시 끝내지 못한 일을 마저 하는 생활을 지속해왔던 거다. (오후 7시에 나오는 것도 때때로 지켜지지 않아 그런 날엔 남편에게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여러 욕심과 부담감이 뒤엉킨 혼란 속에서 일하던 2주 전, Y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날도 나는 야근을 하고서 언니의 메세지를 확인했었지. 오랜만에 언니와 통화를 하게 되어 기분이 들뜨려는데, 언니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의 이전 조직 동료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팀은 아니라 가깝게 일하진 않았어도, 조직에서 플레이샵을 떠났던 날 같은 조가 되어 하루 종일 에버랜드를 함께 누비고, 집에 돌아올 땐 그분의 차까지 얻어타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부랴부랴 전화를 끊고 다른 동료께 연락하였더니 사고사라고 전해주셨다. 아아.. 어찌 이렇게도 한순간에 삶과 죽음이 갈라지다니! 나의 마음도 이렇게 황망하고 아픈데, 유족들의 마음은 어떨지 감히 상상이 안되었다. 나는 옆 팀 리더로서 참으로 존경했던 고인을 추모하고, 나의 작은 발걸음과 기도로나마 유족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다음날 장례식에 갔다.


다음날 장례식에 도착하였는데, 뭔가 이상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온전히 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사고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틀 뒤 발인이 끝나고서야 밝혀진 진실은 고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상위 리더의 압박이 매우 심했고, 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돌아가신 나의 옛 동료는 정말 책임감 있는 분이셨다. 내가 기억했던 그분은 참으로 합리적이고 실력에서 나오는 여유가 있던 분이셨다. 그리고 플레이샵에서 돌아오던 길에 들었던 그분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그분은 참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그랬던 분께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선택을 하기까지는, 상위 리더의 사이코적인 실적 압박이 있었던 거다.


나는 그 이후로도 여전히 야근을 하였다. 그렇지만 나의 옛 동료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서는, 아주 조금은 더 사람들의 시선을 내려놓게 된 것 같다. 때때로 내 마음에 일을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이 스며들 때, 나는 속으로 혹은 밖으로 되뇐다.


행복하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려고 일하는 건데, 일하면서 괴로우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를 성실하게 보든 월급 루팡으로 보든, 나 스스로만 떳떳하게 일과 가정을 챙겨가면 되는 거 아닌가.

누가 뭐래도, 행복한 엄마로 아내로 친구로, 그저 행복하게 서 있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


오늘도 야근을 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점차 야근을 안할 수 있도록 내 기준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준을 계속 내려놓는 연습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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