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천을 걸으며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 아버지가 쓰는 글

우리 동네에는 창릉천이 흐른다. 창릉천은 서울의 북쪽을 담당하는 주산인 북한산에서 발원해서 삼송리, 원흥을 지나 강매와 행신을 거쳐 한강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이다. 워낙 북한산이 깊고 넓은 탓인지 가뭄 때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고, 큰비라도 오는 날에는 하천 변 자전거 도로는 물에 잠길 만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기도 한다.


내가 거주하는 행신동의 창릉천은 하류이기에 강폭이 넓고, 하천 변 땅도 상당히 넓게 퍼져 있다. 그러기에 봄과 가을이면 각종 꽃을 심어 주민들이 꽃놀이하는 풍경을 정겹게 펼쳐지기도 한다.


나는 그 창릉천을 자주 걷는다. 한강 변에서 창릉천까지 잘 닦여진 자전거 도로를 타고 약 16km 정도 이어진 길을 걷노라면 계절에 따라 다양한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 봄에는 봄이, 여름에는 여름이, 가을에는 가을이, 아니 겨울에도 겨울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더구나 한강에서 출발해서 멀리 솟은 북한산을 조망하며 걷다 보면 걷는 내내 북한산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일을 쉬는 관계로 아침을 느지막하게 먹고 8시 반쯤 집을 나섰다. 행신역을 지날 때면 항상 출근길 전철을 타는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런 사람들을 뚫고 유유자적 걷는 나는 조금은 여유롭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행신역을 지나 강매 다릴 건너다보면 왼쪽으로 북한산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강매 다리를 건너서 강매역에서 항공대 역으로 가는 전철과 KTX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지막한 기차 소리와 함께 아무도 만나지 않는 호젓한 산길을 걸을 수 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홀로 음악을 들으면, 라디오의 사연을 들으며 어떤 기계나 수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롯이 두 발로만 내가 원하는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걷는 것을 좋아했을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라는 시에 심취했을 때부터.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구름에 가는 달이 어떤가 싶어 매일, 밤마다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구름 사이로 흐르는 달을 보면서 어느 날은 달무리를 보기도 했고, 어느 때는 달이 요염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를 읊으며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걸음은 오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게 호젓한 철길과 헤어질 때쯤 되면 작은 다리 밑으로 창릉천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아침도 그렇게 같은 길을 걸으며 물길을 만났다. 나는 물길이 흐르는 다리에 잠깐 서서 북한산에서 한강으로 흐르는 물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든 생각, ‘오늘도 어김없이, 한결같이 강물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나님이 북한산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한강을 흐르게 하신 이후, 지금까지 창릉천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하나님이 북한산에서 한강까지 물줄기가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만드신 이후 이처럼 물은 스스로 알아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흘렀을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다가 문득 인생을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고,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음을. 그리고 창릉천의 물길이 한강으로 합류하며 스러지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내 인생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생명의 물줄기에 연결되어 그분이 목적하는 곳에 이르게 될 것임을. 아직 용변도 가리지 못하고, 말문도 트이지 않은 23개월 손녀를 보면 나도 좀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씩씩하게 창릉천을 걷는 나 자신을 보면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좀 더 남아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렇게 내가 걷고, 숨 쉬고, 사랑하며,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음은 참으로 황홀한 것임을, 감사한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길들인 창릉천을, 지리산 둘레길을, 정서진에서 부산 낙동강 하구까지의 600km의 길을, 동해의 시퍼런 해파랑길을 나는 계속 걸을 것이다.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7일 오후 04_28_25.png 걸어가는 남성의 모습을 AI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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