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 아들이 쓰는 글
맞벌이 부부라고는 하지만 엄마는 엄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 중심으로 생각한다.
일자리를 구할 때도 직장과 어린이집과의 거리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래서 "엄마"하고 부르면 정겹지만 "아빠"하고 부르면 어린애 철없는 말투같이 들린다.
아빠라고 우두커니 서서 시간을 버리지는 않는다. 아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세상이라는 정글 속에서 앞장서 길을 만드는 것이 아빠다.
풀도 베고, 해충도 치우고,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찾아낸다. 마땅히 걸을 길을 준비하느라 고개 돌릴 시간이 적을 뿐이다. 그저 아이는 엄마 품속에 안전히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우리 가족에서도 나보다는 아내가 어린이집에 더 자주 들른다. 퇴근 시간도 이르고, 거리도 가깝다. 아내가 아이를 찾아오는 것이 내가 퇴근하여 곧장 집으로 오는 것보다 빠르다.
이런 관계로 곧잘 심부름을 하고 집에 오곤 한다. 아이가 먹고 싶다는 과일도 사 오고, 아이가 먹어야 할 반찬거리도 사 온다. 때로는 아이가 달라고 때를 쓰는 군것질 거리도 사 오기도 한다.
덕분에 아빠가 오면 딸이 달려 나온다. 달려 나와서 살피는 것은 반가운 아빠의 얼굴이 아니라, 아빠의 쉬어버린 목소리도 아니라, 무엇을 가져왔을까 궁금한 아빠의 두 손이다.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걸 들고 오니, 아빠가 오면 아빠의 두 손을 살핀다. 아빠의 두 손에 들린 가방을 봉투를 물건을 확인한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찾아내고 만다.
아빠로서는 그 시간이 참 좋다. 아빠의 두 손을 바라보며 아빠를 반기며 웃어주는 아이의 미소도 참 좋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고 엉거주춤한 태도와 어설픈 발음으로 전하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소중하다.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일상의 순간이다.
헌데 어쩌다 한번 빈손으로 온 적이 있다. 그냥 빈손일 뿐이면 다행인데, 차에 있던 쓰레기들을 봉투에 들고 올라온 적이 있었다.
아이는 아빠가 문을 여는 소리에 달려왔고 아빠의 두 손을 보았는데 가득 찬 검정 봉지가 있으니, 행복해서 그 봉투를 달라고 졸라대었다.
쓰레기라고, 버려야 한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듣지 않아 속에 내용물을 확인해 주었더니 실망해하는 아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가 커져갈수록, 내 육신이 노쇠할수록 그날처럼 망연자실한 그 표정을 짓는 횟수가 많아질 것 생각하니 속상하다.
지금 어릴 때, 쉬이 그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때, 기쁨을 주는 일이 버거움을 넘어 불가능이 되기 전에, 매일 내 아이를 웃게 하고 싶다.
내 마음이 이리 헛헛한 것은 나이가 들어서인가, 몸이 커져서 인가. 내 아이처럼 행복을 누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때문인지.
다 비워내고 최소한의 소망만 가지고 살고 싶은데, 내가 버리는 것이 꿈인지, 욕심인지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 나의 철없음을 보고 그분이 웃어주실는지 도대체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