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커피 장인
남편은 매일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어 커피를 내려준다. 그 커피를 내가 좋아하는 잔에 담은 후 내 앞에 같이 앉는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묻는다.
"어때?"
"음, 어디 보자.. (한 모금) 오, 맛있어!"
맛있다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이런 대답에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가 무턱대고 맛있다고 하는 건 아니다. 맛이 없으면 없다고, 불편한 맛이 섞여있으면 별로라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저 반짝이는 눈은 더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또?'
"건포도 맛이 나지 않아?"
건포도? 나에게는 도무지 건포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포도도 아니고 건포도라니.. 와인처럼 혀에 쩍쩍 붙는 건조한 달콤함 같은 건가?.. 한 모금 더 마셔보고 혀를 끌끌 차서 맛을 더 끌어올리는 시늉을 해본다. 음, 여전히 모르겠다. 건포도 맛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어쩜 커피에서 그토록 상큼한 건포도 맛이 나는지 남편은 "와아" 여러 번 감탄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박수까지 친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날,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는데 내 코 앞에 뭐가 훅 들어온다. 곱게 갈린 원두이다.
"무슨 향이 나?"
지난 커피에서 건포도 맛을 느끼지 못했던 둔감한 내 혀를 대신하여 내 코가 설욕의 기회를 엿본다. 코를 킁킁거리면서도 코보다는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여러 가지 단어 중에 적당한 단어를 애써 찾는다. 그냥 '커피향'이라고 할 수 없어서 그럴듯한 단어를 찾아본다. 오, 단어를 찾았다.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들어 느리게 말한다.
"음, 초콜릿 향인가?"
내 대답을 들은 남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건초 향이 나지 않느냐고 한다. 건초는 무슨 건초? 나는 분명 달콤한 향을 맡았다고 주장해본다.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며 작게 중얼중얼거린다. 굉장히 더 큰 각도로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이 찝찝한 패배감은 뭘까.
매일 커피에 흠뻑 빠져 사는 남편을 보며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저 모습을 보겠구나 싶다. 건포도 맛을 느끼고 건초 향을 맡으며 남편의 어깨는 매일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커피 장인이 된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마침 일본의 커피 장인 두 명의 대담을 엮은 '커피집'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어 남편에게 선물해줄 요량으로 책방에 주문을 넣었다. 교보문고 책 박스가 아닌 동네책방의 고운 포장을 곁들여 선물하고 싶었다. 그 책을 꽤나 흥미롭게 읽던 남편은 커피의 또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이건 또 뭐야?"
주방에서 새로운 아이템이 발견되었다. 헝겊처럼 생긴 드리퍼였다. '커피집' 책을 읽고 융드립 커피를 마셔보고 싶던 남편이 구입한 것이다. 일반 종이 드리퍼는 커피 원두의 기름을 다 흡수하지만, 융 드리퍼는 기름을 여과 없이 그대로 추출한다. 그래서 건포도 맛과 건초 향을 모르는 커알못인 내가 마셔도 훨씬 더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느껴졌다. 같은 원두인데도 종이 드리퍼로 추출한 것과 그 맛이 퍽 달라서 신기했다. 남편은 추출 시간과 원두 양을 이리저리 조절해가며 또 한껏 신이 났다.
"이건 또 얼마야?"
남편은 고급 원두의 세계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내 입에서는 또 돈 얘기부터 나온다. 최고급 원두 중 남편이 최근 사들인 것은 '신의 커피' 라고 불리는 '게이샤' 원두. 이미 집에 각 나라의 스페셜티 원두가 넘쳐나는데 그것보다 10배는 더 비싼 게이샤 원두를 사들인 것이다. 얼마냐고 묻는 내 질문에 미래의 커피집 주인이 당연히 이 세상 맛있다는 원두를 다 내려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말문이 막혔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있는 원두를 많이 먹어봐야 맛이 없는 원두도 알 수 있고, 손님에게 더 맛 좋은 원두를 추천할 수 있지 않느냐 등등 한껏 맞는 말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큰 한 방을 날린다.
"그렇게 돈돈돈 하다가 금방 망할 거야."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돈에만 신경 쓰다가 질 낮은 원두를 쓰게 되고, 더운 날 에어컨 안 틀고, 추운 날 난방 전기료 아끼느라 손님 다 쫓는다는 잔소리를 한바탕 들었다. 너무 맞는 말인데 우리 집 재무부장으로서 나는 왠지 모르게 좀 억울하기도 했다. 그리고 예감했다. 나의 퇴사일은 점점 더 멀어질 예정이라고...
지금도 앉은자리에서 추출 비율을 달리 한
두 번째 커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과연 첫 번째 커피와 다른 맛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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