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Jan 27. 2022

남편과 커피(2)

미래의 커피 장인


남편은 매일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어 커피를 내려준다. 그 커피를 내가 좋아하는 잔에 담은 후 내 앞에 같이 앉는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묻는다.


"어때?"

"음, 어디 보자.. (한 모금) 오, 맛있어!"


맛있다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이런 대답에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내가 무턱대고 맛있다고 하는 건 아니다. 맛이 없으면 없다고, 불편한 맛이 섞여있으면 별로라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저 반짝이는 눈은 더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또?'


"건포도 맛이 나지 않아?"


건포도? 나에게는 도무지 건포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포도도 아니고 건포도라니.. 와인처럼 혀에 쩍쩍 붙는 건조한 달콤함 같은 건가?.. 한 모금 더 마셔보고 혀를 끌끌 차서 맛을 더 끌어올리는 시늉을 해본다. 음, 여전히 모르겠다. 건포도 맛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어쩜 커피에서 그토록 상큼한 건포도 맛이 나는지 남편은 "와아" 여러 번 감탄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박수까지 친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날,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는데 내 코 앞에 뭐가 훅 들어온다. 곱게 갈린 원두이다.


"무슨 향이 나?"


지난 커피에서 건포도 맛을 느끼지 못했던 둔감한 내 혀를 대신하여 내 코가 설욕의 기회를 엿본다. 코를 킁킁거리면서도 코보다는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여러 가지 단어 중에 적당한 단어를 애써 찾는다. 그냥 '커피향'이라고 할 수 없어서 그럴듯한 단어를 찾아본다. 오, 단어를 찾았다.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들어 느리게 말한다.


"음, 초콜릿 향인가?"


내 대답을 들은 남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건초 향이 나지 않느냐고 한다. 건초는 무슨 건초? 나는 분명 달콤한 향을 맡았다고 주장해본다.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며 작게 중얼중얼거린다. 굉장히 더 큰 각도로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이 찝찝한 패배감은 뭘까.




매일 커피에 흠뻑 빠져 사는 남편을 보며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저 모습을 보겠구나 싶다. 건포도 맛을 느끼고 건초 향을 맡으며 남편의 어깨는 매일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커피 장인이 된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마침 일본의 커피 장인 두 명의 대담을 엮은 '커피집'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어 남편에게 선물해줄 요량으로 책방에 주문을 넣었다. 교보문고 책 박스가 아닌 동네책방의 고운 포장을 곁들여 선물하고 싶었다. 그 책을 꽤나 흥미롭게 읽던 남편은 커피의 또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이건 또 뭐야?"


주방에서 새로운 아이템이 발견되었다. 헝겊처럼 생긴 드리퍼였다. '커피집' 책을 읽고 융드립 커피를 마셔보고 싶던 남편이 구입한 것이다. 일반 종이 드리퍼는 커피 원두의 기름을 다 흡수하지만, 융 드리퍼는 기름을 여과 없이 그대로 추출한다. 그래서 건포도 맛과 건초 향을 모르는 커알못인 내가 마셔도 훨씬 더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느껴졌다. 같은 원두인데도 종이 드리퍼로 추출한 것과 그 맛이 퍽 달라서 신기했다. 남편은 추출 시간과 원두 양을 이리저리 조절해가며 또 한껏 신이 났다.


"이건 또 얼마야?"


남편은 고급 원두의 세계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내 입에서는 또 돈 얘기부터 나온다. 최고급 원두 중 남편이 최근 사들인 것은 '신의 커피' 라고 불리는 '게이샤' 원두. 이미 집에 각 나라의 스페셜티 원두가 넘쳐나는데 그것보다 10배는 더 비싼 게이샤 원두를 사들인 것이다. 얼마냐고 묻는 내 질문에 미래의 커피집 주인이 당연히 이 세상 맛있다는 원두를 다 내려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말문이 막혔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있는 원두를 많이 먹어봐야 맛이 없는 원두도 알 수 있고, 손님에게 더 맛 좋은 원두를 추천할 수 있지 않느냐 등등 한껏 맞는 말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큰 한 방을 날린다.


"그렇게 돈돈돈 하다가 금방 망할 거야."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돈에만 신경 쓰다가  낮은 원두를 쓰게 되고, 더운  에어컨  틀고, 추운  난방 전기료 아끼느라 손님  쫓는다는 잔소리를 한바탕 들었다. 너무 맞는 말인데 우리  재무부장으로서 나는 왠지 모르게 좀 억울하기도 했다. 리고 예감했다. 나의 퇴사일은 점점  멀어질 예정이라고...




지금도 앉은자리에서 추출 비율을 달리 한

두 번째 커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과연 첫 번째 커피와 다른 맛을

찾을 수 있을까요?...




.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과 커피(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