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가리야, 백로를 부러워하지 마.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이 있다.

by 바울리


자연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어떤 것도 자연의 왕국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VAU06239.jpg 왜가리|70mm|1/320s|F2.8|ISO 100



순진한 왜가리가 날아들다.


왜가리 한 마리가 공원의 작은 연못으로 날아들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의 경사면이 미끄럽지도 않은 것인지 용케도 단단히 내려앉았다. 녀석은 곧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날아오르더니 물가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물속의 붕어들이 꽤나 먹음직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째 이 녀석 사냥 솜씨가 영 형편이 없다. 부리와 발톱을 물속에 번갈아 내다 꽂으며 연신 사냥을 시도를 하는데 첨벙이기만 할 뿐 전혀 소득을 내지 못하고 있다. 붕어들이 연못에 잔뜩 흩어져 있는데 한 마리를 못 잡다니. 왜가리는 날렵한 사냥꾼으로 소문났다고 하던데, 언제나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다.



VAU03295.jpg 잉어|35mm|1/125s|F2.8|ISO 100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철새라고 사정을 봐주진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새들도 과거보다 더 나은 생존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논두렁을 호기롭게 휘저으며 물고기를 단숨에 낚아채던 과거의 영광에 갇혀버린다면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다. 왜가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황새는 서툰 사냥실력 탓에 국내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황새와 엇비슷한 사냥실력을 가진 따오기나 저어새, 두루미도 멸종위기종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왜가리는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철새다. 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완벽하게 적응하며 사계절 텃새로써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딱히 천적도 없는 먹이사슬 최상단의 포식자가 바로 왜가리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녀석을 좀 보게나. 큼지막한 부리를 가지고도 물 반 고기반 수준의 유아용 연못에서 고작 붕어 한 마리를 못 잡아 애를 먹고 있다니.



VAU05542.jpg 비둘기 무리|70mm|1/125s|F2.8|ISO 250



왜가리도 슬픔을 느낄 수 있을까?


붕어와 사투를 벌이던 왜가리에게서 돌연 슬픈 기색이 엿보인다. 예상 밖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겨서 좀 더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여러 가지 몸짓에서 감정의 단서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날개를 신경질적으로 접었다 펴기를 반복한다거나, 앞발을 들어 목덜미 부분을 벅벅 긁는 행위, 날카로운 부리를 좌우로 휘젓거나, 붕어를 등지고 넋이 나간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행동들이 대표적이다.


그래도 눈빛하나는 초롱초롱하니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는데. 거듭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도전하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럴까? 뭐라도 대차게 하나 낚아챌 줄 알았건만.



VAU06427.jpg 왜가리|70mm|1/320s|F2.8|ISO 100



불공평한 인생이라고 해도


왜가리에게 흥미를 잃은 나는, 잠시 장미 밭에 내려앉은 백비둘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순백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백비둘기는 붉은 장미가 흩날리는 무대 위를 사뿐사뿐 걸어 다녔다. 남들의 시선이 익숙한 듯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때 문득 인근 호수원에서 유명한 '백로'의 존재가 떠올랐고, 왜가리의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지금 깊은 '자괴감'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하얀 깃털로 치장한 옆 동네 백로는 이 녀석에게 자괴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출중하다. 멋진 사냥실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외모면에서도 왜가리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철새. 이 녀석도 분명 호수원의 인플루언서, 백로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VAU06252.jpg 백비둘기|50mm|1/400s|F2.8|ISO 100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이 있다.


백로가 잘 나간다고 해도 그것이 너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러니 왜가리야, 주눅 들 필요가 전혀 없단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 그만이다. 실력이 모자라면 그만큼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거지.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자존심 상해할 필요도 없어.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면 언젠가는 너만의 날이 올 거야.


오늘 내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단호하게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예전에도 그렇게 올바른 행동을 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과거의 올바른 행위는 지금의 나를 정당화해 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결국엔 항상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랠프 왈도 에머슨 『자기신뢰』


나는 왜가리가 붕어 사냥에 성공할지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여기서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왜가리는 신중한 포식자라서 행동 사이에 시간 간격이 무척이나 길기 때문이다. 벌써 20분째 미동도 없다.



뭐 아무쪼록. 힘내라. 순진한 왜가리야.









서울식물원 습지원의 백로



사실 왜가리는 사냥의 고수입니다.


왜가리는 주로 물가나 습지에 자리를 잡고 긴 다리와 부리를 이용하여 물속의 먹이를 잡습니다. 사냥 대상은 물고기나 양서류, 작은 동물 등 다양하며 먹이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사냥방식을 조절하고 다양한 사냥기술을 활용합니다. 다만 사냥실력은 개체마다 다를 수 있고 경험과 학습에 따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왜가리는 오리처럼 물에 뜨지 못하기 때문에 얕은 수심의 물가에서 생활합니다. 발을 지면에 단단히 디디고 사냥을 하길 좋아하는데, 연못의 수심이 다리길이보다 조금 깊어서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물에 반사되는 한낮의 강한 빛, 시야를 방해하는 분수의 물줄기, 물결로 인한 사물의 왜곡을 뚫고 움직이는 먹이를 잡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아마 평소에는 손쉽게 먹이를 낚아채는 프로 사냥꾼일 겁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최신 맛집리스트를 섭렵한 왜가리입니다. 인간이 관리하는 호수에는 주린 배를 채울 먹음직스러운 물고기들이 무한리필로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요. 아마 내일도 모레도 와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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