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_정한아
"베토벤 소나타 24번은 '테레제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곡이에요.
교수님은 그 곡의 주인공인 테레제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했어요. 우아한 선율에 걸맞은 아름다움과 생기를 지닌 여자, 모두가 꿈꾸었던 여자 말이에요.(중략)
처음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나 자신을 잊을 수가 있었어요. 그건 정말 근사한 기분이었죠."
p.121
나는 거짓말을 하는 기분을 알고 있다.
스스로를 진실에서 배제시키고, 거짓말쟁이라고 낙인찍고,
어둡고 습한 자기혐오의 늪에 가둘 때 느껴지는
작은 쾌감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유미에게 관심이 갔던 것이다.
우리가 동종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나를 그녀에게 이끌었다.
p.237
그녀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욕심이
그녀를 자꾸만 무리한 사칭으로 몰고 갔다.
p.141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생긴 게 반질반질한 게 꼭 새하얀 조약돌 같더군요.
나는 매력적인 사람은 믿지 않아요.
그 안에 뭘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p.222
'너 왜 그랬어.'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잖아.'
'오랜 시간 내가 간절히 바란 것은 오직 하나,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변장과 거짓말을
실제라고 믿는 정신 착란에 빠지는 것.
그랬다면
이토록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허상이라도 딛고 설 땅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를 속일 때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무대이며 도처의 아름다운 사물들도
결국 소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