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있어줘서 고맙다

#048

by 서하

그냥 있어줘서 고맙다

by 서하


작은 입술이

내 젖을 찾아와 닿을 때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다


너는 나를
찾지 않고도
이미 찾은 듯 안긴다

나는 너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설명된 마음으로 품는다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
눈두덩이의 미세한 떨림,
그 작은 생김새 하나하나가
내 심장을 어루만진다


나는 너를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사랑을 배우는 중이고


너는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이미 사랑으로 태어나는 중이다


젖이 차오를 때마다
내 안에 피어나는 고백은
그저 이 말 하나뿐

“그냥 있어줘서 고마워.”
“살아 있어줘서, 안겨 있어줘서… 고마워.”


세상이 너에게
무언가 되라고 말할 때에도
엄마는 안다
너는
그냥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라는 걸



✥ 모티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그냥 있어줘서 고맙다』

오늘 청소년들과 프로그램을 하면서,
산과, 신생아실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 친구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기와 엄마와의 사랑의 교감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어요.

아이가 아직 언어나 사고력이 발달하기도 전에, 엄마의 존재와 품, 손길과 눈빛 안에서 사랑을 '몸으로' 배워갑니다. ‘이게 사랑이야’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는 매 순간 사랑을 느끼며 받아들이고 성장하죠.
아기는 자라면서 이 시기의 엄마를 뚜렷이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엄마의 돌봄은 아이 안에 ‘기억’이 아니라 정서적 뿌리, 안전감, 세상을 신뢰하는 힘으로 남습니다.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흔적 없이 스며들기 때문이겠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엄마와 아이 사이에 흐르는 존재적 사랑, 그 깊은 유대의 신비를 시로 표현해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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