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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졸필은 붓을 가린다

by 무념무 May 14. 2020

컴퓨터 워드로 사이버 강의용 리포트를 쓰는데 도무지 글 한 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글쓰기가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땐 키보드가 찰칵찰칵 거리는 것이 타이핑 치는 맛이 있었다. 대학을 다닐 무렵 사용했던 286 컴퓨터에 연결되어있던 키보드를 사용할 땐 말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못쓰는 것은 눅눅하고 밋밋한 키감의 싸구려 멤브레인 키보드 탓일 거다,라고 생각하고 진짜 좋은 키감을 가진 키보드를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명필은커녕 졸필이었던 나에겐 좋은 키보드만이 좋은 글을 생산한다는 착각에 단단히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약 10여 년 전쯤의 일이다.


온 세상을 뒤질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온라인상에는 리얼포스 해피해킹 필코 같은 일본계 고가의 키보드들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당장 30만 원대의 '극강의 키감을 자랑하는' 리얼포스 104 키보드를  질렀다. 배송을 목 빠지게 기다리다가 막상 받아보고 사용해본 리얼포스는 키감이 좋은 것은 분명했지만 내 손이 기억하던 기계식 키보드의 찰칵거리는 맛은 없었다. 다시 '정통 기계식 체리 축을 사용하는' 20만 원 조금 못 미치는 가격의 필코 마제스터치 키보드를 구입했다. 찰칵찰칵 거리는 손맛이 내가 찾던 기계식 키보드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내가 처음 키보드를 사용할 때의 추억 속의 그 키감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며 1990년대 초반에 보급되었던 세진이라는 메이커의 키보드를 구하러 다녔다. 당시에 내가 사용하던 키보드의 상단에 붙어있던 SEJIN이란 로고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사용했던 키보드가 세진 skm-1080이었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미 단종된 지 오래된 모델이었기에 네이버 중고나라를 두 달 가까이 매복한 덕에 분당까지 가서 직거래로 업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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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해피해킹-필코 마제스터치-리얼포스-세진 SKM1040




추억 속의 키감을 찾았다고 해서 완벽한 키보드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기성품 키보드들을 구입해 봤지만 무엇하나 '완벽한 키감'에 조금 못 미쳤다. 사실 완벽한 키감이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 그런 판단을 하기엔 이미 키보드에 대한 매니악적 폭주는 시동을 건 상태였다.  나처럼 키보드에 매니악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왕성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단지 기성품 키보드를 수집하는 차원을 떠나 직접 스위치를 분해하여 기름칠을 하고 압력을 조절하고 멋들어진 하우징을 직접 디자인하고 훌륭한 디자인이 각인된 키캡을 제작하는, 쉽게 말하면 직접 자기 손에 딱 맞는 수제 키보드들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를 쫌 한다는 사람들에게 기계식 키보드는 필수품이 되었고 심지어 PC방마다 기계식 키보드가 깔려있을 만큼 대중화되었지만, 당시에는  기계식 키보드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키보드 마니아들 뿐이었다. 나 역시 그런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키보드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일단 선배 마니아들이 만든 수제 키보드를 중고로 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질 좋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키캡들을 해외 직구하고 커뮤니티 공구에 참여하여 비싼 하우징들을 수집하는 등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가 결국 인두기를 들고 납땜질까지 하게 된다. 기판을 구해서 내가 직접 커스터마이징 한 스위치들을 붙인 후 하우징 도면을 구해다 아크릴 업체에 주문하여 키보드를 조립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좋은 글을 쓰겠다고 시작한 키보드의 여정은 결국 키보드를 만드는 여정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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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일일이 튜닝하고 해외에서 키캡을 직구하고 기판과 하우징을 구해서 직접 조립한 키보드들)




키보드 조립은 사실 품이 어마어마하게 든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과 집중력도 많이 든다. 직장에서의 내 업무가 바뀌면서 더 이상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키보드 조립에 열중할만한 여유가 사라지면서 나는 다시 본연의 글쓰기 자체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다. 좋은 키보드는 잔뜩 있으니 이제 좋은 글만 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독서할 시간조차 없이 쫓기며 사는 와중에 글까지 쓰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천상 틈틈이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글을 쓸 기회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무게는 둘째치고 부피가 큰 기계식 키보드들을 항상 짊어지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키보드 취미를 접을 즈음에는 휴대가 용이한 미니 키보드 제작에 주력했다. 아이패드나 태블릿 등에 작지만 훌륭한 키감에 근사한 모양을 한 미니 기계식 키보드를 케이블로 연결하여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이 쓰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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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조합으로 글 한 줄 쓴 기억이 없다. 아니 키보드에 취미를 붙인 이후로 주욱 그랬다. 글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무엇인가 글을 쓸 일이 생길 때 내 가방에 마침 아이패드와 키보드와 케이블이 들어있는 경우가 없었고, 아이패드와 키보드와 케이블을 착 가방에 넣어두면 글 쓸 일이 생기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이패드에 케이블을 끼우고 키보드를 꺼내 연결하는 작업은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옛날 타자기처럼 기계식 키보드에 스크린이 달린 일체형 전용 워드 머신이 있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할 때 마침 그런 제품이 해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다. 이름하여 프리 라이트(Freewrite, 처음 펀딩 사이트에 론칭되었을 땐 이름이 헤밍 라이트였다.)라는 이름의 전자타자기.  50만 원 가까이를 들여 바로 펀딩에 참여했고 신청한 지 1년이 넘어서야 우리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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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치 E-ink 스크린에 갈축 기계식 키보드가 한 몸에 내장된 휴대용 워드 머신, 따악 내가 원하는 걸 찾았나 싶었지만, 이것은 편집 기능이 없었다. 한번 글을 주욱 적어나가면 다시 앞부분으로 커서를 옮길 수가 없었다. 순전히 초벌 글쓰기용이었다. 글을 편집하고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기를 이용해야 했다. 이래서는 나한테 별로 쓸모가 없다. 전문적인 작가가 아닌 이상 말이다. 한글 모드일 땐 커서가 표시가 되지 않는 것도 불편함의 하나였다. 게다가 부피도 생각보다 커서 휴대하고 다니기가 쉽지 않은 기기였다. 그러던 중 이번엔 스크린 대신 태블릿을 꼽아서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사용하는 타자기가 역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다. 페나 키보드란 제품으로 한국사람이 론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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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체리 스위치에 타자기 모양의 키캡으로 모양새나 기능이나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고 바로 펀딩에 참여하였다. 역시 1년여를 기다려 받아본 제품은 그런대로 무난하였지만, 충전식이 아닌 건전지를 사용하는 부분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페나 키보드로는 몇 편의 독후감을 적는 데 사용하였다. 하지만 늘 휴대하고 다니기엔 부피가 너무 컸다. '오늘은 나가서 글을 써야지'하고 마음을 먹어야만 가방에 넣을 수 있었다. 사실 기계식 키보드와 디스플레이 모두를 구비한 채 태블릿처럼 늘 휴대가 가능한 제품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계식 키보드는 각 스위치가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미니 키보드 이상으로 사이즈를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고 미니 키보드라고 해도 길이가 최소 28cm인 것이다. 거기에 액정까지 달면 답이 없다. 결국 기계식 키보드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선택의 폭은 매우 넓어진다. 그렇게 이번에 선택한 것은 8인치 미니 노트북이다. Chuwi란 중국 회사에서 크라우드펀딩으로 론칭된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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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최고급 키감에 익숙한 내 손 기준으로는 극악의 키감과 변태적인 키배열을 가졌지만, 나름 주요하게 쓰이는 문자 부분은 키캡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여, 기존의 넷북이나 미니노트북의 키보드처럼 키캡의 크기가 매우 작아 타이핑에 불편함을 주는 부분은 덜어주는 세심함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가 작렬하는 타이핑은 피할 순 없지만.  어쨌건 이제 항상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워드 머신이 생겼다. 이제 글만 쓰면 된다. 자 그런데 이제 무슨 글을 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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