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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 한 달 만에 열한 권의 책을 읽고

by 무념무 Jun 10. 2020

전자책은 정말 어이없는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다. E-Pub가 나오고 여러 종류의 전자책 단말기가 출시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아이티 기술이 낳은 기괴한 망작이라고 여겼다. 내가 아는 책이란 것은 종이 위에 글자가 인쇄된 것을 의미했다. 태어나서 줄곧 그런 모습의 책만 봐왔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은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장 맛깔난 경험이다. 그런데 전자기기에 글자를 띄워놓고 스크린 터치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고는 그것을 책이라고 부르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전자책 예찬론자가 되어있다. 6인치 전자책 단말기를 스마트폰처럼 손에 들고 다니며 틈틈이 책을 읽는다. 전철 안에서 서서 가며 책을 읽고 자리에 누워 어두운 방안에서도 책을 읽는다. 단말기 하나에 수백 권의 책이 들어있고 필요하면 원하는 책을 즉석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도 있다. 종이책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도서 월정액 무제한 다운로드 서비스이다. 밀리의 서재나 리디북스 셀렉트 등이 있다. 나도 살면서 종종 책을 많이 읽고자 시도한 적이 있지만 책값에 대한 부담으로 늘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였다. 한정된 돈으로 책을 고르려니 한번 읽고 넘어갈 책보다는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고르려 했고 그것은 결국 집에다 어려운 책만 잔뜩 쌓아놓고 잘 읽지도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도서 월정액 서비스를 이용하고 나서는 책값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로와지다 보니 돈 때문에 읽지 못했던 쉽고 재미있는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 년에 백 권씩 책을 읽는다는 경우를 보면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전자책을 마음껏 이용하면서는 나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당장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읽은 책은 무려 11권이다. 일 년으로 환산하면 132권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지난 한 달간의 이북 홀릭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갑자기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한 이유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글은 왜 갑자기 쓰고 싶어 졌느냐 하면, 지난달 초에 가까운 사람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게 된 것이 결정적이다. 나와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가까운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게 큰 허망함을 안겨주었고 어느 날 나의 삶도 그렇게 그렇게 끝날 수 있다는 자각이 들면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글을 쓰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꼭 말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의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글의 소재 혹은 주제로써의 의미 - 다른 말로 하면 콘텐츠 - 를 찾는 일 자체가 무심코 흘러 보내던 나의 시간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좋은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우선 의미, 콘텐츠다.

직접 내가 부딪히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콘텐츠이겠지만, 십 년 넘게 집 직장 취미(운동)를 쳇바퀴 돌고 있는 나에겐 언감생심 기대할 바가 못되고 간접경험으로써의 책 읽기를 시작하게 된 것인데 당장 예전처럼 어려운 책을 읽을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에, 일단 쉽고 재미있고, 분량이 300페이지 내외의 책들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책의 첫 부분을 읽고 어렵거나 재미없거나 내용이 부실하다 싶으면 그 책은 완독을 포기하려 했는데 다행히도 여태 그런 책은 없었다. 대부분의 책들이 재미가 있었고 어떤 책들은 단숨에 읽어치워 나갈 수 있었다.

책을 읽겠다고 다른 시간을 희생한 것도 아니다. 회사에 연차를 쓰고 책을 읽은 일도 없고, 취미로 하는 테니스도 꼬박꼬박 나가서 즐기고 있다. 단지 코로나 때문에 모임이나 회식이 크게 줄어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모조리 책 읽는데 쓴 것도 아니다. 유튜브를 보거나 의미 없는 웹서핑을 하거나,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간단한 게임을 하는 시간들을 책을 읽는 것으로 돌렸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한 달에 열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이 재미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는 참 읽을 거리가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 걸까?  

영화나 드라마는 보기가 참 편하다. 정해진 배우가 정해진 연기를 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책은 내가 글을 읽어가며 배우를 만들고 그 배우를 연기시켜야 한다. 또 하나의 창작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좀 피곤한 일이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지 뇌를 굴리려 하지는 않는다. 아름답게 생긴 배우 얼굴이 먼저 나오는 영상매체와 달리 깨알 같은 글씨로만 이루어진 형식도 뇌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책은 그러한 이유로 매력이 있다. 글이라는 원초적인 기호만을 흡수하여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상상력을 키워주고 능동적인 사고를 일으킨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열려있는 속성으로 인해 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창조나 융합의 덕목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바탕이 될 수 있다. 다른 미디어도 결국 그 바탕은 글이고 책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 평균으로 볼 때 아주 근소하게나마 책에 대한 친밀도가 높은 쪽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달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전자책과 도서 월정액 다운로드 서비스이다. 전체 도서시장으로 볼 때는 신규 진입자에 해당한다. 앞으로는 평균 이하의 독서 친밀도를 가진 사람들도 나처럼 책 읽는 재미를 들게 할 수 있다면 점점 쇠락해가는 활자문화가 다시 바닥을 찍고 올라갈 수 있으리라 본다. 책은 분명 그만한 저력이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좋은 문장력이나 전통적인 문학의 정의는 그다음의 문제라고 본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읽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읽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이란 책에서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우리 시대는 부단히 변화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프랑스 출판은 과거의 특권과 고루한 전통, 거동이 불편한 연로한 작가들, 그리고 그들 못지않게 나이 든 독자들에 기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작가들의 목표는 전체 독자 수를 최대한 늘리는 것, 이것 한 가지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소비하게 만드는 미국 드라마와 영화, 비디오 게임, TV 등의 매력 공세, 이것들이 제 적이죠. 소설은 독자에게 자기만의 이미지를 창조해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 줘요."



PS. 지난 한 달 읽은 책의 목록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넬레 노이하우스 저)
- 나는 북한댁이다 (북한댁 저)
-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 생각했나?
- 서점의 일생 (야마시타 겐지 저)
-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이재열 저)
-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김시덕 저)
- 역사의 쓸모 (최태성 저)
- 소실점 (김희재 저)
- 고시원 기담 (전건우 저)
- 제7일 (위화 저)
- 죽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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