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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Apr 12. 2017

혼자 아파해도 돼

세 그루의 나무


회사 한편에서 키우는 무성한 포도나무 사이 시들어가던 잎 하나를 보았다. 무척 더웠던 지난여름 더위에 지쳐 죽어가고 있던 잎 하나에 묘한 마음이 동했다. 그것이 과거의 일 하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 것을 즐겼다. 책을 들고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책을 보았다. 함께 먹을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런 혼자의 시간이 좋았다.


당시 부천으로 집이 이사를 간 탓에 나는 신림동까지 통학을 하고 있었다. 전학을 할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전학을 가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또다시 적응해야 하는 것이 싫었고, 전학을 하고 며칠간 완전한 이방인이 되는 듯한 그 기분도 싫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 세 번이나 겪었던 그 기분이 몸서리 처지게 기분 나빴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같은 장소에서 밥을 먹었는데, 유독 그날 등나무에 사람이 많았다. 나만의 공간이라 생각하던 장소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할 수 없이 약간 떨어진 곳에 나무 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서 세 그루의 나무를 만났다.


무성한 두 그루의 나무 사이 잎사귀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져 보이는 한그루. 그날의 풍경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건, 두 나무의 잎이 마치 죽어버린 나무에게도 잎이 무성하게 보이도록 감싸주는 듯한 모습에 내 마음이 투영되는 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등나무 대신 난 그곳을 향했다. 그곳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나무들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기분이 좋으면 점심시간이 끝나고도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덕분에 담임선생님께 엄청나게 혼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날들이 좋았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기도 했지만 딱히 그런 감정을 그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 서로를 감싸 푸르게 보이던 광경에서 친구라는 단어를 진심으로 배운 것 같다고 말하기 어려웠던 나이였다. 아마 그들도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여전히 나는 점심을 먹으러 세 그루의 나무 밑으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두어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뭔 일인가 싶어 몇 발짝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는데, 가슴에 쿵하는 울림이 이어졌다.

죽어버린 나무를 잘라내라 지시하는 선생님의 대화. 며칠 후 세 그루의 나무는 두 그루가 되었다. 두 그루의 나무 사이는 잎이 없던 나무가 있을 때보다 휑하니 비워져 버렸다. 나를 투영했던 존재의 부재가 몹시 먹먹한 기분으로 다가와 괴로웠다.


이후 나는 등나무도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곳도 가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며 혼자 밥을 먹었다. 시끄러운 점심시간이 며칠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 부천으로 전학을 갔다.




혼자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질질 끌고 다녔지만 사실 내게도 나를 푸르게 하는 존재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앙상한 나를 늘 푸르게 보이도록 자신의 잎을 기꺼이 내주고 나를 가려준다. 다만 나는 그것들을 너무 모르고 지냈다. 과거 잘려나간 나무를 생각하며 나 역시 결국은 잘려 나가 사라질 것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이 되려 타인을 더 밀어내어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포도나무에서 잎사귀를 보았던 날 나는 몇 년 만에 수채화로 그림을 그렸다. 방법도 몰라 너무 엉망으로 그렸다. 꽃을 예쁘게 그리는 지인의 블로그를 보고 열심히 참고하기도 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방법을 묻기도 하며 부단히 애를 썼다. 그리고 그것을 다 그렸을 때 비로소 나는 스스로 내게 내민 다른 이들의 푸르름을 받아 내 몸 위로 덮는 느낌을 받았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려내는 대상이나 생각에 집중하며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 그런 과정에서 과거 어렸기에 몰랐던 실수나 나의 잘못들, 우울감 등을 정리해 털어내는 과정이 되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간에 있았던 슬픔들을 위해 정성껏 치르는 장례 의식 같았다.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 푸르름을 내민 이들에게 먼저 말해주고 싶다.

혼자 아파해도 돼. 너 또한 푸르게 보이도록 내가, 우리가 감싸 안아줄게.

내가 혼자 아플 때 나를 위해 내밀어 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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