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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Apr 17. 2017

유년시절 2

철문이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중여, 유년시절을 보낸 작은 시골 마을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여전히 어릴적 살았던 집이 여전히 불타버린 모습으로 있었다. 예전리라고 적힌 커다란 돌을 지나, 논밭을 한참 따라가면 고모가 살았던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했던 구멍가게는 고모가 떠나버린 뒤로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 뒤로 커다란 우물이 놓여있었지만, 집집마다 수도가 생기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메워버린 지 오래다. 현재는 논이 되어 흔적이 기억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뒤로 어르신들이 쉬어가던 시정이 있었다. 시정 앞에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는 번개에 맞아 다 타버린 감나무가 전설처럼 마을을 내려보고 있었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는 영원히 마을을 지켜볼 것만 같았지만 태풍이 몹시 심하게 불던날 부러져 죽어버렸고, 모두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구멍이 숭숭 뚫린 감나무는 여전히 맛이 좋은 감을 열리우며 시정에서 앙상히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길을 따라 계속 걸어 올라가면 마을 회관이 보이고 다시 삼거리를 지나면 유년시절 내가 살았던 오래된 집이 나온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신 큰아버지께서 어린 시절 이사 오셨다는 이 집은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고 하니, 거의 100년이 되었을 낡고 오래된 집이다.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감나무, 단감나무, 석류나무, 사과나무, 똘배 나무, 앵두나무, 포도나무, 대추나무와 보리수가 집을 끌어안듯 감싸고 있었다. 집의 입구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고, 그 옆으로 대문이 있었을지 모르는 흔적과 언제부턴가 무너지기 시작한 담벼락이 마당으로 이어져 있다. 집을 들어서면 낡은 집만큼이나 오래된 외양간에서 이따금씩 소가 나지막이 울음을 울곤 했다. 외양간 앞에 가득 채워져 있던 건초와 코뚜레를 하고 쟁기를 매던 소는 이제 없지만, 소를 매어두던 흔적은 여전히 창고로 변해버린 외양간의 한편에 남겨져 있다. 


아빠 따라갈래? 엄마 따라갈래?


초등학교 2학년, 매일 같이 싸우던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우리를 큰집에 맡겼다. 나는 울면서 동생 손을 붙잡고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우리를 큰집에 맡기고 자리를 잡으면 데리러 오겠노라 말하며 떠난 아버지는 명절에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큰집은 이미 대식구였다. 할머니와 큰아버지, 큰어머니, 7남매가 있었다. 9명이 살던 집에 2명이 맡겨져 11명이 되었다. 몇 개 되지 않는 방에 다닥다닥 붙어 잠을 자야 했다. 그 시절 나는 동생과 할머니 방을 함께 썼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치매로 오래 고생을 하셨다. 다행히 심한 치매는 아니셨지만, 주말마다 가서 뵙던 포근하던 할머니와는 달랐다. 구멍 난 양말을 기워주던 할머니의 포근함은 함께 살게 되던 그쯤 어딘가 모르게 낯설고 무서운 분이 되어 계셨다. 


치매로 고생하시던 할머니는 늘 밥을 하라며 큰어머니를 재촉했고, 큰어머니께서는 지쳐버린 마음만큼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커다란 가마솥에 끼니때마다 밥을 지어 올렸다. 대식구의 사이에 끼어 자란 우리는 천덕꾸러기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작은 상에 11명이 모여 앉아 밥을 먹을 때면 밥 앞에 놓인 몇 가지 반찬 외에는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았다. 욱여넣듯 밥을 밀어 넣고 밥그릇에 물을 부어 마시고 나면, 건넛방으로 도망치듯 넘어갔다. 



철문아. 하연아. 언능 자야.


일찍 저녁을 먹고 할머니 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우면 불을 끄며 할머니께서 늘 그리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나를 철문이(철민이), 동생을 하연이(하영이)라고 부르셨다. 나를 철문이라고 부르는 분은 할머니 밖에 없었다. 도시와 달리 불을 끄면 한없이 깜깜 해지는 방에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구멍 난 창호문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어둠 가득 몰려오는 벌레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아름다운 은하수가 지나던 유년시절. 


철문이라 부르시던 할머니는 밤하늘에 별에 되어 가셨고, 아무리 맑은 날에도 은하수는 더 이상 밤하늘에 찾아오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시골집을 찾을 때면 철문이와 하연이가 살던 그때가 집안의 곳곳에서 아련하게 떠오를 때가 많다. 


영롱하게 피어나는 색감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애잔한 그 시절의 기억. 나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집안 곳곳에서 피어나 눈이 시리게 느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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