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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May 23. 2017

당신과 천일홍, 끝내 알리움

변치 않는 사랑과 무한한 슬픔


오랜 기간 사람들이 꽃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이나, 꽃이 생겨나게 된 여러 전설들을 통해 누적된 감성들이 꽃마다 꽃말이란 것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사람들은 장미(열렬한 사랑)를 바라보며 사랑을 담고, 아네모네(사랑의 괴로움)를 바라보며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의 감정을 느껴왔을 것이다. 그런 감성은 공감으로 누적되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1월 12일

알리움이란 꽃을 그리라 그럼 어떻게 그리려나?

테디베어 해바라기를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대화중에 이런 말이 나왔다. 나라면 알리움이란 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당시에는 알리움이란 꽃을 알지 못했다.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제법 그림으로 그리면 재미있을 소재라고 생각되었다. 단순한 것보다는 그릴 것이 많은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별생각 없이 그리고자 하는 마음만 가지고 일단 담아두기로 했다.


알리움을 그려보자 마음먹었을 때 꽃말을 검색해보았다. 

알리움의 꽃말은 무한한 슬픔, 멀어지는 마음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꽃말의 의미를 모두 차용해서 그릴 필요야 없겠지만, 수많은 꽃잎들이 저마다 슬픔을 담아 거대한 우주를 이루는 것처럼 모여 있는 느낌이었고, 꽃 사이 새롭게 터져 나오는 봉우리들은 여전히 피어나고 있는 무한한 슬픔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것을 그린다면 여러 감정을 꺼내서 힘들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념무상 그리세요. 자꾸 마음을 쏟지 마요.


그림을 그릴 때 나름 전하려는 감정을 열심히 되뇌어 보는 편이다. 행복한 한때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울하고 힘든 그림을 그릴 때에는 그런 감정을 계속해서 그림 위로 꺼내 본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고, 표현도 미흡하니 마음이라도 간절히 담아야 보는 사람도 그림에 담아두려 했던 내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바라봐 주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멀어지는 마음과 무한한 슬픔이란 소재를 그리기에 덜컥 겁이나 당장은 그릴 수 없겠다며 덮어두었다.




1월 24일


알리움을 어떻게 그릴까 궁금해하던 이가 내게 사진을 보내왔다. 외국 어디선가 찍은 사진인 모양인데, 보라색 꽃이 가득한 들판에 금발 머리를 한 소녀가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풍경을 바라보다 알리움이 떠올랐다. 알리움이 가득 핀 곳에 여인이 앉아 있는 풍경이 겹쳐 보였다. 


무한한 슬픔 위로 주저앉은 여인을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서 이별 뒤 지나버린 후회와 아름다웠던 한때, 그것들을 무한한 슬픔으로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일었다.



3월 15일


여전히 알리움과 함께 여인을 그리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림 안에 슬픔만을 그리고 싶진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감정을 버텨낼 수 있을 자신도 없었다. 그림의 크기도 큰 편이라 완성까지 꽤나 걸릴 것 같아 더욱 그런 마음을 지속적으로 끌고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나간 일들과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회자정리 會者定離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반드시 있다는 가르침,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결국 이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단순한 이별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별들과 같이 이별이란 것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당연한 삶의 이치라고 그간 이별의 아픔을 견뎌왔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 변치 않는 사랑을 한다 해도, 우린 언젠가 세상의 이치에 따라 무한한 슬픔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림에 미쳤다. 



천일홍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 매혹이다. 변치 않는 사랑이 끝내 무한한 슬픔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생각.

그렇게 천일홍(변치 않는 사랑)과 알리움(무한한 슬픔)이 아름다운 당신의 주변에 모였다. 아름다운 당신, 나의 사람. 그리고 사랑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연인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무한한 슬픔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사실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는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다.





4월 12일


당신과 천일홍을 완성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정말 좋은 풍경에 담아두고 싶었다. 세 번의 스케치와 종이를 바꾸고 나서야 시작된 그림이 며칠이 걸려 완성되었다. 


당신과 천일홍. 변치 않는 사랑을 나는 잘 담아낸 것일까. 






5월 1일


끝내 알리움을 그렸다. 멀어지는 마음과 무한한 슬픔이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했다. 

끝내 알리움은 결국 모든 사랑의 끝이고 그로 인해 무한한 슬픔, 멀어지는 마음이 도래하리란 것에 마음이 쓰이는 것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오랜 작업으로 손목마저 상해서 심하게 아파왔지만, 그보다 감정적인 부분에서 나를 지속적으로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슬픔과 걱정, 앞일의 우려, 그로 인한 아픔에 대한 생각들이 계속해서 몰아쳤다. 뭐 대단한 것을 그린다고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단 생각마저 일었다. 나는 한낱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뿐이지 예술을 하는 사람도, 또 좋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다. 고작 이 정도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뿐인데... 

그러나 알리움으로 시작했으니 이 모든 것을 알리움으로 끝을 내야 했다. 




5월 5일


알리움을 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제 당신을 아름다운 풍경에 머물도록 하고 싶다는 마음만이 남았다. 천일홍(변치 않는 사랑)도 알리움(무한한 슬픔)도 결국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끝이 나는 과정이기에 전부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남겨두고 싶었다. 전체를 열심히 다듬고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아름다운 곳에 당신을 담아두려 노력했다. 그리고 5월 5일 서명을 하면서 이 정도가 지금 내가 보일 수 있는 그림의 정도라고 생각하며 끝을 냈다. 



당신과 천일홍, 끝내 알리움 / 590 X 416mm / 파버카스텔 수채 색연필


당신과 천일홍, 끝내 알리움


만남이 있으면 늘 헤어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제게 천일홍(변치 않는 사랑) 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끝내 알리움(무한한 슬픔)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순간들이 가득할수록, 다가올 이별은 더 깊고 무한한 슬픔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끝내 알리움으로 내게 무한의 슬픔을 주더라도, 

함께 지냈던 순간을 가득 수놓았을 천일홍을 떠올리면 

무한의 슬픔도 담담히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끝내 알리움일지라도 아직은 좀 더 천일홍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당신도 이 아름다운 풍경에서 반짝이는 사람으로 제게 머물러 준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고 이리 마음을 썼던 것일까. 그저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즐겁기 위해 그리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하고 즐겁다. 하지만 마음을 쏟으며 괴로워할 때도 있다. 


알리움을 그리면서 나는 왜 이것을 그리고 있을까 여러 번 생각했다.


내가 느꼈던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을 이야기하고 담아내어 완성되는 순간에 나 역시 그 감정을 털어낸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내 이야기에 공감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쏟아 낸 이야기에 비록 자신만의 다른 감정이 일더라도, 내 그림에 빗대어 한 번쯤 생각하며 잠시나마 머물러 줄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찰나에 지나지 않을 짧은 순간의 머무름이라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서 조금은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또 앞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며 보내게 될 일상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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