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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Jun 02. 2017

습작 인생

멈춤에서 배운 것들


매일 그림을 그린다.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위들 중 하나다. 


어떤 그림은 완성했지만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그림이 되었고, 어떤 그림은 멈춰 서 더 이상 그리지 않을 그림이 되기도 한다. 매일 그리는 그림들이 모두 마음에 들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이 들지 않아도 끝까지 붙잡고 어떻게든 완성하는 것들도 있다. 


그렇게 매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거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다. 많은 감정이 매번의 그림에서 다르게 나타나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 때도 있다. 


완성을 하고 나면 그런 그런대로의 뿌듯함에 기분이 좋지만, 이번의 그림들처럼 멈춰버린 그림들은 반대로 포기해버린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못할 때도 많다.





올해 초 함께 그림을 그리는 분께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두 번 다시는 꺼내보지 않고, 볼 수도 없을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나요? 반드시 버려질 수도 있는 그림을 말이죠.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 영혼을 갉아먹을 만큼 모든 것을 다해 그려본 적이 있나요?


나의 뚱딴지같은 질문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편하게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우문현답.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에 그림이 때론 괴롭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줄이고, 편하게 마음먹는다면 그림을 끝까지 그려내고 완성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주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민들레 홀씨 같은 사람. 최근 나에게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지인이 해준 말이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 과찬에 괜스레 미안함이 일 정도다.


과거에는 그저 보기 좋을 그림들만 그렸다. 어떤 생각이 담기지 않더라도 보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골라 그렸다. 당시에도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나의 어떤 것도 잘 담지 않았던 것들이라서인지 내게도 남는 것이 없었다. 껍데기만 두루뭉술하게 있는 그런 그림들과 같았다.


그러다 2016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그림에 나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솔직해진 표현방식을 담은 그림들은 이전보다 내게도, 보는 분들에게도 어떤 것들을 남기게 되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매번 이런 고민이 결국 때로는 그림을 멈추게 만들고, 깊은 고민에 괴로워하며 그림을 그리게도 만든다. 물론 멈추는 것도 계속 그리는 것도 결국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에는 멈추는 것이 마냥 좋지 않다고 느꼈다. 패배하고 나자빠진 기분. 

그러나 날지 못한다고 낮은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뛰지 못한다고 타인보다 느린 것이 아니다. 또 걷지 못한다고 뒤처지는 것이 아니고, 앉아만 있는다고 멈춰 버린 것이 아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다르듯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른 것뿐이다. 그것들을 단점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림을 그리면서 겨우 그 정도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그림을 멈춘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그림을 그린다. 나를 치유해보겠다고 그리는 일상이 멈추건, 완성하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단조롭고 낮게 흘러가는 바람처럼 발목을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그림을 그린다고 특별히 다른 날들이 되지 않는다. 다만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희미해지고 어제와 그제, 그 전날들의 경계가 희미해져 버린다. 멀어진 시간은 결국 소멸되고 사라져, 망각이란 저장고에 쓰레기처럼 어제와 오늘이 쌓여갈 뿐이다. 그림은 그렇게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일상 위로 점을 하나 찍어 남겼다. 완성을 했건 하지 못했건,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고, 드러내는 것을 통해 일생이란 기나긴 시간 위로 점을 하나 찍어 남겼다. 이따금 그림을 꺼내보며 그날 남긴 점 하나를 곱아보듯 다시 회상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 글도 그런 행위로 언젠가 꺼내볼 날이 있겠지. 


또 습작으로 멈춰버린 그림들도 훗날 아름답고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데, 일조를 한다면 분명히 그것대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인생 역시 이런 습작과 같은 것들이 모여 보다 나은 삶을 향해 가는 방법들을 익혀나가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멈추어야 하는 습작 인생도 그런 면에서 나쁘지만 않다는 생각이 든다.


멈춰버린 그림을 통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멈춰버린 순간이 포기라고 생각되어 언짢은 기분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라도 그린 그림을 통해 무엇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니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그림을 그리고 지내는 지금의 내가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도 일었다. 


그림을 그리고 산다는 것에 나름의 감사함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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