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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Jun 08. 2017

낮은 곳으로

포기한 뒤에 편안해진 것들

그림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며 바득바득 애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그림을 직업으로 삼아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높은 곳은 나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인생의 오르막을 위해, 그동안 올랐던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했다.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은 어쩐지 포기해버리고 인생의 패배자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그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게 했었거늘.


직업으로서의 그림을 포기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오르기 위해 기를 쓰며 그리던 때보다 회사를 다니며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지금의 나는 더욱 자유로워졌고, 더 다양한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다.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 비단 실패와 직결되거나 멈추고 그만두는 것만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지금은 그림과 관련이 없는 직업의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의 오르막이 달라졌다. 물론 지금의 오르막도 힘들고 지친 일상임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다만 이번의 오르막은 그림을 통해 위로받고, 용기를 얻으며 위안을 느끼곤 한다. 


가끔 이전에 오르던 그림에 관련된 오르막이 눈에 아른거리며 나의 걸음을 무디게 만든다. 낮은 곳으로 내려오며 미련을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미쳐 다 두고 오진 못한 모양이다. 특히나 회사에서 요즘처럼 일이 많이 생기는 때에는 더욱 심하게 요동치곤 한다.


그런 마음을 겨우 며칠간 펜으로 드로잉을 하며 잠재웠다. 겨우 달래볼 수 있었다.


낮은 곳으로 와서 새로운 오르막을 오르는 요즘. 그림을 위해 오르막을 오르던 때보다 더욱 그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감사하다. 그림을 여전히 그리고 있다는 것에.


포기한 뒤에 편안해지는 것들에 그림이 있을지 몰랐지만, 포기했음에도 얻은 것이 더욱 많다고 느끼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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