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벽의 흰 당나귀
바람을 마주하고 비로소 나의 바람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
20살이 되었을 무렵 멀지 않은 시기에 만화가가 되어 멋진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 무엇을 하지 않아도 찾아올 응당 숙명 같은 것이라 여겼던 철없던 시기.
하지만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30대가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될 수 없었던 20대를 지나고 30대가 되어서야 무엇이 과오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꽤나 오랜 기간 기나긴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무기력한 시간을 꽤나 오래 보내고서 삶의 풍경을 바꿔보자며 4년 전 제주로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당장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걱정이 앞서던 나는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제주를 갈 수는 없었다.
그때에 제주로 향했다면 아마도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제주를 떠났을 것이다.
삶의 풍경을 바꿔보겠다며 제주로 떠난 것도, 20대에 꿈꾸던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꽤나 오래 그리지 않던 그림을 다시 그리며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그간 바라던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매일 회사를 다니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그렇게 4년. 다시 제주의 삶이 떠오를 무렵 많은 것을 그만둔 채 제주로 떠났다.
제주로 떠나온 지 1달여, 지인들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렸다. 함께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했고,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것인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하루였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아주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은 그림을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멈춰진 일상은 다소 불안하지만 삶 자체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하루하루 그렇게 만족도를 높이며 살아갈 수 있다면 멈춰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제주라는 특별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오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사실 제주가 아니더라도 삶에 보다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반복되던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쉬어가듯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를 돌보는 삶.
반복되던 일상의 많은 것을 멈추고 오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바람이었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멈춰 서라고, 잠시 쉬어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 필요한 순간에 멈춰 설 수 있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