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git Jan 16. 2022

짐의 블랙홀을 없앤다

올해 꼭 집정리 할거야

제주도에서 그림을 모두 빼온 후 집은 더 난장판이 되었다. 이렇게 그림을 많이 그렸나? 이렇게 액자를 많이 만들었나? 나 자신에게 놀랄 정도다. 한편으론 작은 그림들이 많아 다행이다. 큰 그림들은 정말 어찌 정리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대형 캔버스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이녀석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된다. 

신년이 되고 다들 바쁘다는데, 나는 아직까진 전혀 바쁘지가 않다. 신년의 계획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나 이렇게 약간 도태되어 가는건가? 하는 불안감마저 들기까지 한다. 항상 바쁠때는 집을 치울 시간이 없다했고, 널널할때는 이런 불안감에 휩싸여있는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올해가 되면서 작년을 반성해보았다.  어짜피 여러가지 생각만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책상앞에 앉아 생각만 하지말고 엉덩이 떼고 뭐든 해보자!”로 정했다. 일단 뭐든 현관에서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방에 던져놓는 습관을 고쳐야겠다 생각하고, 방을 치우기로 한다. 마침 건휘가 봄방학이 되서 집에 놀러온다는데, 현관 앞 방을 파주의 자기방이라고 여기고 있다. 제주에서 만났을때도“이모, 내 방 잘 있어?”를 몇번이나 물어봤다. 

이 방은 현관과 같은 방향으로 창이 있고, 길쭉한 형태의 방이다. 방 한쪽벽은 모두 책장으로 되어있다. 책장은 이전에 이 집에 살던 언니가 짜넣은 붙박이 장인데 내 책 뿐만 아니라 아주 옛날 부모님이 사셨던 명작, 한국문학전집같은것들까지 우리집으로 오면서 책들을 겹겹이 쌓아두고 남는공간엔 인형이며 작은 소품들까지 올려져있다. 창가쪽으로 책상이 연결되어있는데, 높이가 좀 애매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쓰기에 나쁘지 않은 책상이다. 빈 공간쪽에는 휴식용 팔걸이의자와 발받침이 놓여있다.  처음 이 의자를 구입한 목적은 이 방에서 편하게 만화를 보며 놀기 위함이었다. 부엌에서 가까운 이 방에서 만화를 보고 주전부리를 끊임없이 가져다 먹기 위함이었다. 누가 뭐래도 만화에 최적화된 방으로 꾸미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현관 바로 앞방의 현실은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짐들이 거쳐가는 아니 그곳에 놓인채로 몇달씩 방치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암체어와 발받침을 포함한 모든 공간은 책과 인형과 뭔지 알수없는 짐들과 가방들이 발디딜틈 없이 놓여있다. 

아마 도둑이 든다면, 이미 도둑든 집인줄 알고 집을 뒤지지도 않을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번쩍 뜨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입고 빨아버릴 옷을 입고 방에 들어가서 방 사진을 한장 찍었다. 그냥 봐도 폭탄 맞은 방인데, 작은 화면에서 보이는 방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는 정도로 정신이 없다. 일단 작은 액자들을 책장에 넣어본다. 다행히 뉘어서 넣으니 봐줄만 하게 들어간다. 책들을 빼고 액자들은 칸칸에 채워넣는다. 생각보다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책들도 다시 정리한다. 먼저 사회, 역사, 그림, 디자인등 내 취향으로 대충 나누어서 분야별로 책을 꽂되, 책의 높이를 최대한 맞추어 키가 큰 책을 먼저 꽂고, 한 줄이 꽉 채워지면 사이즈가 작은 책을 2열에 다시 꽂는다. 슬라이딩 구조 책장도 아닌데 지금은 어쩔수가 없다. 정리를 하면서 한숨이 절로나온다. 읽지도 않고 책장을 차지한 책이 너무 많다. 이 방이 마치 블랙홀인것처럼 들어오면 잊었다. 배가본드 전권이 있지만 1-13권이 또있고(아마 이걸 먼저 샀다가 전권을 산것 같다), 3권으로 이루어진 ‘신과 함께’가 두셋트다. 거기에 미생 1-4권까지도 두셋트가 있다. 이게 다 돈인데.. 생각하니 과거의 나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다. 아 이 멍충아! 이런 돈을 아꼈어야지!

액자와 책들을 정리하고 나니 벌써 오후 3시가 되었다. 어제 먹고 남은 된장국을 끓이고 밥을 말아 김치와 먹고, 설겆이를 얼른 했다. 그리고 다시 정리를 시작한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인형들도 찾아냈고, 몇년전에 사주를 보러갔다가 도사님이 해주신 말을 기억하려고 적어둔 쪽지도 발견했다. 할로윈때 쓰려고 두꺼운 리본을 사러 고속터미널 꽃상가에 가려고 했는데, 우리집에 그 두꺼운 리본이 30개나 있었던걸 알게되었다. 게을러서 장식을 덜한걸 칭찬해야 하나? 고민이 든다. 뜯지도 않은 비싼 레고가 두개, 플레이모빌도 3개나 있다. 사실 이거말고도 뜯지않은 레고와 플레이모빌은 몇개 더 있음을 고백한다. 

남동생이 미국에서 사다준 깔깔 웃는 엘모인형과 엄마아빠가 유럽여행에서 사다준 공주같은 인형, 내가 모은 인형들과 어릴때 침대옆에 두고 자던 못생긴 아기강아지 인형도 아직 그대로다. 지금 당장 필요없는건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조언을 여럿에게 받았지만, 나의 역사이자 사랑이 그대로 담긴 이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라니, 그건 할 수가 없다. 

다만, 뭘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어디선가 얻어왔던 천조각들은 다 버리기로 했다.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해본다’는 생각말고,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것들에 집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앞쪽만 조금쓰고 뒤는 그대로인 비싼 스케치 노트들도 여러권, 이것 저것 브랜드가 다른 색연필과 크레용, 파스텔들도 몇세트씩 발견했다. 십여년전 프로젝트를 진행할때 아이디어 스케치를 한것들과, 일러스트들도 발견했다. 내가 생각보다 다양한 작업을 했고, 이렇게 나중에 만나니 그림이 참 예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항상 작업을 할땐 내가 하는것이 맞나? 마음에 딱 들지 않는것같아서 마음이 힘들었는데, 지금보니 칭찬받아 마땅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또 한편으론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도 먹었다. 예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하고있는것들에 익숙해지면서도 내가 가진 기본기를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작업 샘플들중 일부를 버렸다. 과거의 빛나던 순간을 버리는 마음이 묘하다. 새로운 프로젝트로 채우자, 서운하거나 겁먹지 말자고 내 맘을 다독였다.  

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방 정리가 대강 끝났다. 하루종일 먼지속에서 재채기를 연발하며 정리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오늘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왕창 버리지는 못했지만, 버릴것들을 골라내고 정리를 해보면서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잘 한 소비와 잘못한 소비가 있다는걸 알았다. 너무 잘못한 소비인데 아직 너무 새거라 주인을 찾아줘야하는 것도 있다. 남들이 보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것인데도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것도 있다.  


백화점 상품권 10만원권과 이 책을 다읽으면 나 자신에게 상을 주리라 마음먹고 어려운 책속에 꽂아둔 오만원짜리 지폐도 발견했다! 

조만간 사려고 했던 노트가 있었는데, 포장도 뜯지않은 새 노트도 두개나 발견했다. 치우지 않았으면 영영 잊고있었을것이다. 정리해서 돈을 번 기분이다. 로또 당첨운도 없는데 오늘은 한 20여만원을 번 것 같다. 치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로또가 별건가, 이렇게 찾아내는게 진짜 로또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미안하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